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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Dec 23. 2023

고마워요 전문가씨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6

[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왜 사는지 묻고 따지고 싶어 산책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 합니다 . 이래 저래도 이유는 분명하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사는 건가에 대한 물음에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타인의 안녕도 챙기면서라고 대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덧 열흘뒤면 2023년이 각자의 갤러리 속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잠깁니다. 한 해 동안 내가 '오늘도 안녕'하게 살아내는데 도움을 준 모든 것(표상뿐만 아니라 물자체까지도)에 대한 인사를 해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늦더라도 열흘 안에는 그 고마움을 고백해야겠습니다.

_________2023년에게 보내는 공개고백_3 ]



매일의 루틴 중 하나. 커피다. 새벽에서 이어진 하루의 시작이 커피다.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커피다. 원두를 분쇄기(올해 참 열 일했다. 만원 조금 넘게 주고 구입했는데, 올해 투자 대비 효과가 가장 좋은 부분 중 하나를 채워준 고마운 기계다) 넣고 갈아 준다. 한참 전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7초 정도만 갈면 진하게 먹을 경우 딱 2잔. 향기 가득한 원액을 얻을 수 있다.


그 정도를 내리고, 내가 진하게 한 잔을 마실 즈음, 앞자리 신퉁샘이 출근한다. 그리고 어느 날이나 변함없이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건네면서 연하게 한 잔 마신다. 그런데 아, 가을이구나 하던 추석 무렵. 그 루틴이 살짝 흔들렸었다. 한 일주일 가까이. 원두를 갈면 옆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뽑아 내린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도 그렇게 했다. 먼저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커피가 영 덜 맛있었다. 이유가 뭘까 하다 보니 정수기에서 나온 온수가 미지근했다.


내가 자그마한 정수기를 꼈다 켜보고, 신퉁샘도 출근해서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켜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우리는 오래된 정수기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추측을 했다. 끌어올린 차가운 수돗물을 통과시키는 관을 덥히는 센서 정도가 고장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나름 꽤나 합리적인 추측. 이유가 어찌 되었건 선선한 아침에 미지근한 커피. 쉽지 않다. 어쩌면 탄산 다 날아간 콜라보다 더 하다. 아침 커피 한잔으로 만들어지는 하루 분의 아드레날린이 극도로 부족해진다.


미지근한 커피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소유하더라도 결코 홀로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괜찮은데, 괜찮지 않은 그런 애매함이 차고 넘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추구하면서 사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명 행복이다. 이 말은 애써 얻으려고 하는 가지가지는 다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루를 시작할 때 따듯한 한 모금의 커피도 그렇지 싶다. 아주 작지만, 반드시 필요한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진한 향기다.


그리고 며칠 지난 어느 날 점심때쯤. 신퉁샘의 표정이 한없이 밝았다. 다시, 뜨끈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서. 그랬단다. 내가 수업 중에 때마침 정수기를 점검하러 오신 담당자분께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그랬단다. 아, 그래요. 어, 여기. 이거. 이 버튼이 절전모드로 내려가 있었네요. 정수기를 절전으로 만들어놔서 그랬네요. 자, 이제 되었습니다,라고. 며칠간의 미지근함이 버튼 하나 때문이었던 거다.


그 말을 듣고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정수기 뒷면을 들여다봤다. 세 개의 빨간 버튼이 나란히 있었다. 첫 번째 버튼은 오프, 나머지는 온이어야 한다고. 절전이라는 버튼은 없었다. 첫 번째 버튼의 기능이 절전이라는 의미였었던 거다. 봐도 들어도 내 것이 되지 않는 게 세상은 역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가'라는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평생 그렇다. 누구나 가보지 못한 길은 설레지만 두렵다. 두려움은 일상에서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외면한다. 버튼 하나를 온, 오프로 바꾸는데 의외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


이제 다시 새벽을 이어받은 아침 루틴을 진하게 시작하면서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스물 하나 아드님은 4월생이다. 우리 부부는 오래되고 자그마한 다세대 빌라 2층 끝방에서 돌 전의 아드님과 함께 신혼을 보내고 있었다. 얕은 계단을 올라 한참을 길게 이어진 복도 끝. 그 집은 너무 추웠다. 어릴 적 뜨근한 이불속에서 코가 쨍하게 만들었던 외풍도 오랜만이었다. 무심코 튼 찬물이 11월만 되어도 얼음물처럼 느껴졌다. 절정인 건 자그마한 거실에 붙어 있는 화장실은 분명 거실에서 나갔는데 화장실 자체는 바깥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빌라 2층 벽면에 출되어 매달린 모양.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공간을 비스듬히 화장실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그래서 추운 그 집에서 화장실이 가장 춥다는 건 아드님과 함께 한여름을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드님 첫돌 전 겨울은 끓인 물을 받아다 거실에서 씻겨야 했다. 그래도 그 집에서 아드님은 뒤집고, 잡고 일어나고, 할아버지 얼굴에 오줌을 갈기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렇게 이듬해 4월, 돌잔치도 하고 친구들도 찾아와 축하도 해주고.


그 이듬해 여름이 될 무렵이었다. 결혼도 처음, 아빠도 처음이었던 것처럼 모든 게 처음 해보는 것 투성이었던 때였다. 집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편함을 직접 해결해봐야 하는 것도 여전히 처음이었던 삼십 대 초반의 마음만 아빠였던 때. 그 집의 또 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바로 변기. 툭하면 막혔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물 내림이 시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매번 그러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2층이 아니라 22층 폭포수 꼭대기에 변기가 매달린 듯 콰르르하고 내려가곤 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막힘 현상이었던 거다.  


이럴 때는 '전문가'를 부르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는 건 그 일 이후에 느끼게 되었다. 내가 해볼게, 할 수 있을 거야, 하다 돈 쓰고 마음 상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한참을 애쓰다 동네 철물점에 우연히 들렀다. 거기에서 소개받은 변기 전문가. 오십 대는 훨씬 넘었지 싶은 배불룩한 아저씨. 그런데 이 분이 참. 그날은 마침 아드님과 아내가 집에 없었지만 이런저런 용품들을 보면 아기가 있구나 싶었을 텐데, 화장실 문을 닫고 담배를 피우는 거였다.


그때는 내가 담배를 한참 피우다 1차 금연을 꽤나 유지하고 있던 상황. 하지만 구수한 커피 향 같은 담배 냄새에 같이 취해 있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돌아왔을 때 남아 있을 담배 냄새가 걱정이었다. 아드님도 있고. 그래서 단박에 그랬다. 아니, 여기서 담배를 피우시면 어떡합니까. 그랬는데, 이분 표정이 지금도 또렷하다. 헤벌쭉한 표정(일곱 살 장난꾸러기가 오십 년 동안 그 표정 그대로 주름만 생겼지 싶을 정도로)으로 나를 쳐다보며 그랬다. 다, 필요해서 그래요, 일 하는 중이에요, 일.


이런, 미친, 뭐. 이런 생각이 불쑥 올라오는 그 순간. 아직 3분의 1은 남은 담배를 그 변기가 던져 넣는 거다. 다시, 한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 하는데, 변기에 물이 콰르르하고 쑤욱 저 깊은 곳으로 끝없이 빨려 들 듯 달려 내려가는 거였다. 어, 뭐지. 그냥 서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는데, 변기를 내려다보면서. 그 사이 내가 안방, 작은방 문을 닫고, 거실에서 바로 바깥으로 이어지는 출입문을 열고 왔을 뿐인데. 결론은 버킹검 궁 관람비보다 아마 더 비쌀 5만 원의 수리비 청구. 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을 안고 살았던 고민을 해결해 준 거니까.


간이영수증을 쓰는 그 아저씨, 아니 전문가분께 일부러 물었다. 어떻게 하신 거냐고. 여전히 여유 만만했던 그 아저씨의 표정은 잘난 척하는 거드름이 아니었다. 어리디 어린(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 아드님아) 삼십 대 아빠한테 생활 지혜를 한 수 알려주려는 아버지 마음 같았다, 고 느껴졌다. 너무 자세하고 상세하게 구부렸다 폈다 바깥으로 나가서 집 전체의 구조를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고. 그랬다. 지금은 당연하게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내가 이 문, 저 문을 닫고 열고 오는 사이에. 아저씨는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긴 일자 드라이버로 변기와 욕실 바닥이 접한 부분. 그 부분에 칠해져 있던 하얀색 접착제(백시멘트다. 지금은 실리콘을 많이 사용하지만) 부분을 망치로 톡톡톡. 깼단다. 그게 다였단다. 그렇게 다세대별로 모여진 변기 내용물은 지하에 설치된 커다란 정화조에 모인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을 두고 수거되어 가는 원리. 그런데 그 정화조에 모인 것들에서 생기는 가스가 집집으로 이어진 배관으로 역류하면, 그 가스 압력으로 2층이 아니라 22층이어도 물 내림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단다.


산책로, 도로 주변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게 있다. 안전 펜스다. 대부분의 펜스는 일정한 길이의 조각들을 반복해서 이어놓았다. 길이 생긴 모양대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사계절을 지나다 보면, 한해, 두해 지나다 보면 어떤 사이는 이음새가 벌어진다. 많이 벌어져 떨어진 경우도 보인다. 그러나 비가 올 때도, 눈에 쌓여도, 벚꽃이 휘날려도 전체적으로 여전히 안전 펜스의 역할을 다해내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의 역할이 안전 펜스가 아닐까 싶어 진다.


올 한 해 우리 사이가 벌어졌다, 붙었다 하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동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의미 있게 지켜주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전문가들. 오고 가는 길목에서, 머무는 장소에서, 내 안의 힘이 밖으로 나오기 위한 진통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준 사람들. 그분들 덕에 올 한 해도 별 탈 없이 지냈지 싶다. 크고 작은 탈을 잘 이겨내었지 싶다.


그분들은 우리다. 우리가 그분들이다. 그렇게 우리 각자도 다 그분들이었다. 2024년에도 전문가가 전문가가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으면 한 해가 또 안전하게, 진한 행복으로 채워질 수 있을 거다.


내년에도 정말 모두 잘 '오늘도 우리 같이 안녕'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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