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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09. 2024

생의 명랑성

[오늘도 나는 감탄寫] 29 ... allure

재작년 가을. 추석 연휴가 막 지난 어느 날 아침. 여느 날처럼 출근을 위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머리를 감다 상체를 들지 못했습니다. 상체를 숙인 채 엉거주춤 엉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았죠. 옆으로 돌아 일어나 한참을 구부정했던 게 만 1년, 햇수로 2년입니다. 자연스러운 노화현상이라고 하는데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초기에 스테로이드 주사액으로 통증을 주기적으로 잡았습니다. 한의원에서 침도 자주 맞았고요. 심지어는 아드님이 사는 밴쿠버에 일을 보러 가서도 침을 맞아야 했습니다. 


한 달여 정도 괜찮아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 그렇지'하면서 일시적인 현상이었구나 싶어 원래 일상 패턴대로 활동을 했었죠. 몇 달간 하지 못한 운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았죠. 좋아하는 사이클도 타고,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사이클은 뚝섬을 지나 구리까지 이어지는 남한강 코스를 즐깁니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날은 뚝섬 정도까지만 다녀오는 왕복 3시간 좀 못 되는 50킬로 구간 정도로 달렸고, 한 달에 서너 번은 10킬로에서 20킬로미터 구간의 달리기도 병행했네요.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허리 통증은 더 커졌습니다. 밤에 잠을 자는 자세마저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에 허리통증이 만성이 된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런저런 책을 보고, 콘텐츠를 섭렵하면서 결국 약물 치료보다 운동을 통해 근력을 키우고 자세를 바로 잡아야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미 이 세상에 있었던) '정답'을 몸으로 알아가는 중입니다.    


책상 위에 올려 높낮이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책상을 두 개 구입해 집에서 출근해서 서서 읽고, 일합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허리에 무릎이 통증을 양보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어지더군요. 간단하지만 꾸준하게 무릎, 허리 근력을 강하게 만드는 동작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동작 두 가지. 허리 통증의 유경험자들뿐만 아니라 운동을 하는 이들 모두 추천하는 동작은 바로 산책과 플랭크.


두 동작을 매일하면서 알았습니다. 내 몸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것을. 여태껏 연습도 전혀 없이 언제든지 내 몸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만들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마구 부리면 세상의 어떤 것도 정상적일 수 없을 텐데. 왜 그런 생각들을 하지 못했을까 싶어 지면서 내 몸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한번 틀어진 몸은 관계처럼 쉽사리 사과를 받아주지 않네요. 우리는 이런저런 정보들을 접하면서 어느 순간(그 순간을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후 자신의 확고한 믿음이 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것이라고 믿는 자기 확언, 즉 신념이죠. 문제는 그 신념의 오류를 중간에 스스로 수정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신념이 몸과 마음의 통증을 유발해도 모릅니다.  


저에게 플랭크가 그렇습니다. 기억을 못 할 뿐 플랭크는 '오래 버티기'라고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60초를 버티기 하면서도 비바람에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흔들리듯 했지만 플랭크 오래 버티기 세계 신기록을 세운 사람 기록이 5시간 가까이 된다, 뭐 이런 것들만 남았던 거죠. 허리 통증 때문에 해야만 하는 자세에서도 또 다른 경쟁적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성공했다, 실패했다를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루 걸러 하루를 시도하다 어느 날부터는 매일 60초. 그러다 100초. 120초. 180초. 넉넉한 배속에 종잇장처럼 숨은 복근이 내 몸 모든 것을 대변하듯 안달복달하듯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최소' 일주일에 3회. '적어도' 연속 5분은 버텨줘야 한다, 는 정언 명령을 스스로에게 하달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나의 내면이 나를 속이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시간은 5분 맞습니다. 그런데 플랭크의 본질에 어울리는 '올바른 자세'가 그 시간 가득히 유지되었는가, 는 자신밖에 모른다는 거죠. 물론 누군가가 체크를 해주는 연습, 아닌 훈련의 상황이 되면 모르겠지만. 그런 단계에서 수십 개월을 꾸준히 하기에는 비용도 시간도 쉽지 않으니까. 그건 비현실적인 부분에 가깝지 싶어 집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어느 날 물리치료를 받다 우연히 듣게 된 '전문가의 조언'. 무조건 버티기만 하는 플랭크는 진짜 플랭크가 아니다,라는 거였죠. 이럴 때 항상 두 마음이 생깁니다. 뭐, 그래도 난 나대로 할 거야 vs 얼른 고쳐서 제대로 효과를 볼 거야. 기질과 성향의 문제겠죠. 귀도 얇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얇아져서 그런 지 저는 후자입니다. 쉽게 변합니다. '올바른 자세'로 살 수 있는 기회라고 믿으면 더욱 그렇게 됩니다. 


분명, 플랭크 자세쯤이야 틀려도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허리 통증이 없었다면 매일 몇십 초는 고사하고 평생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허리병 덕분입니다, 분명. '먹으면 배부르고 안 먹으면 배고픈' 당연한 이치를 삶에는 속속들이 적용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일어난 것은. 살아가면서 '허리병 때문에 플랭크'와 같은 상황은 의외로 주변에 참으로 많았다는 것들을 이제야 조금은 알게 됩니다


며칠 전 반려견 타닥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데 익숙한 멜로디가 앞에서 들려왔습니다.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단'. 나도 어른이 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한 기억이 없는 그때. 다 같이 한 팀인 듯 노를 저었던 멜로디였습니다. 국민체조입니다. 중년 부부가 벤치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 앞에 나란히 서서 동작을 진지하게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의식하듯 쳐다보면서도 미소 짓는 두 분에게서 절도 있는 힘이 느껴지더군요.  


맞아요. 그 시절 우리가 하던, 보던 모든 게 '명랑'했어요. 프로이트도 니체도 모를 때였지만, 명랑한 건 마냥 즐겁고 신나고 좋았던. 운동회도 명랑했고, 운동회에 모든 하얀 아이들도 다 명랑했어요. 텔레비전 안에 모인 유명인들이 달리고 뒹굴고 같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어린 나는 그냥 명랑해졌습니다. 명랑이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좋은 거란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중년부부의 모습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으면서 명랑성의 근원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라고 주치의가 말하는 허릿병속에 담긴 속뜻을 알겠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밥을 먹고 욕을 먹는다는 걸 테고, 앞으로 몸과 마음이 아플 일만 남을 건데, 그 시간들을 어떻게 잘 이겨내면서 좀 더 명랑하게 살아낼 수 있을지, 는 다 각자 선택의 몫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나이를 먹으면서 말을 줄여야 한다는 데, 하고 싶은,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욱 내가 가진 신념(이라는 것들)은 항상 옳고, 모두 옳아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신념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 더 잘 받아들이고 스스로 짚어봐야 하는 같습니다. 단, 말대신 글로 말이죠. 


지금껏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글감'들이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지나온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이 어린 사람은 쉽게 느끼거나 접근하지 못하는 '올바른 자세'를 지닌 어른만이 가능한 게 아닐까 싶어 집니다. 내 것을 먼저 내밀지 않고,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나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그 사람 속에 명랑하게 사는 에너지가 샘솟는 화수분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속근육을 제대로 잘 만들어 버티는 어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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