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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16. 2024

어부바, 첫번째 이야기

[오늘도 나는 감탄寫] 30

어제는 지난주 토요일에 이어 두번째 출장이었습니다. 장소는 수원 모대학. 주로 서울 소재 24개 대학의 올해 입시 특징을 두 번의 토요일에 나눠 12개 대학씩, 대학당 30분씩 브리핑을 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수십 년 전처럼, 어쩌면 더 심하게 '대학 진학'이 여전히 12년 학교 생활의 최종 목표로 남아 있으니까요.  


천여석이 넘는 대강당 자리가 다 채워지고도 부족해 계단 통로 여기저기에도 열정적인 교사들은 넘쳐났습니다. 화면화면마다 주요 사항이 나오면 어린 제자들을 위해 마치 긴급 회견장을 방문해 취재에 열중인 카메라 기자처럼 일제히 찍고 메모하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경외로웠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9년 19만 9천 km를 달린 '이영모 씨'(작은 아이가 우리 차를 이렇게 부릅니다. 차 번호판에 '20모'로 시작을 하는 걸 보고 언제부터인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참 좋아요. 뭐랄까, 말 안 하는 또 하나의 가족 같은 느낌이어서 그렇습니다)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도로 위에 가득한 차들마저 후텁한 토요일 오후에 지친 듯해 보였습니다. 의정부까지는 66km. 한 10여 km를 가다 서다를 하는데 그제야 계기판에 깜빡거리는 붉은 주전자가 보였습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듯한 이모티콘. 피곤한 눈으로 냉각수인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 오일 경고등이더군요. 일단, 에어컨을 껐습니다. 


'이영모 씨' 오일은 주기적으로 교환을 했습니다. 기록된 어플 정비내역을 보니 1월 20일에 동네에 매번 가는 정비소에서 했더군요. 내년 1월이 다음 교환 시기였습니다. 그럼, 오일에 다른 문제가 있구나 싶었지요. 하지만 앞뒤 가득한 차들 사이에서, 에어컨을 끈 뜨거운 늦은 토요일 오후여서 어떤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일단 집에 가서,라고 생각을 잠깐 했지만 아드님이 있는 밴쿠버에서 작년 여름에 있었던 차량 고장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지요. 계기판을 며칠씩 무시했다 1차선 일방통행이던 언덕을 오르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었습니다. 


어느 순간 아이언맨 같은 경찰들이 출동하고, 지나쳐 가는 차들 속에서 외국인이라 더 경멸하듯 한 손짓, 얼굴 표정으로 온갖 욕으로 샤워를 했었지요. 뻑, 쎗과 같은 말만 알아듣는 게 다행이다 싶은 하루였던 적이 있습니다. 어제는 주저 없이 얼른얼른 마지막 차선으로 옮겨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달렸습니다. 


보험사에 전화를 했고요. 운전한 지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사고접수가 아닌 '긴급 구난'을 신청했습니다. 마지막 확인 버튼을 누른 지 채 1분여도 되질 않아, 낯선 번호도 너무나 반갑게 받았습니다. 역시 보험사에서 콜을 받은 기사분이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니 토요일 오후에도 문을 여는 근처 공업사를 알려주더군요. 


통화를 하는 동안 금토톨게이트를 막 지나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명칭이 참 반가운 곳입니다만 어제는 그곳을 빗겨나 살짝 양재 이정표를 보면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했죠. 그러면서 내비게이션을 기사분이 알려주신 공업사를 향해 느릿느릿 달렸습니다. 위치가 톨게이트에서부터 약 6.6km 떨어진 강남 도곡동이더군요.


그렇게 달려간 한적한 골목 안. 토요일 오후에 문을 열어준 것 만으로 고맙구나,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구릿빛 피부에 윤기가 나는 사장님이 웃으면서 '사장님, 이거 오일이 없구나'. 하며 가득 찬 다른 차들 사이로 차를 몰아 정비대 위에 올렸습니다. 오일을 조금 충전한 뒤 게이지를 다시 체크하더군요.


예상대로 엔진 오일 양이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오일 센서나 펌프의 문제일 거라며, 여기저기 거래처에 전화를 서너 통 하더군요. 마음을 졸이며 '열어라, 열어라' 했지요. 하지만 토요일 늦은 오후라 차량용 부품 판매점이 문을 다 닫은 거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보험사에 접수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견인'으로. 


기운 넘치는 목소리의 견인 기사분이 그럽니다. '아, 그래요? 지금 제가 그곳까지 가는데 대략 15분 정도 걸릴 겁니다. 얼른 어부바하러 가겠습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어부바'였습니다. 아주 오래전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거나 너무 잘해서 자기를 모르거나 하는) 학생들을 교사들과 멘토링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었습니다. 


그러면서 프로그램명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내부 공모를 했었지요. 그때 가장 많이 받았던 말이 바로 '어부바'였습니다. 제가 업무를 그만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더군요. 명칭이 다시 '무슨 무슨 멘토링'으로 바뀌었던가. 여하튼 여전히 교사와 학생들은 어부바를 하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남아 있어 좋습니다.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보험처리가 되는 견인 거리도 늘릴 수 있다는 것을. 내 차가 견인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는 않았나 봐요. 무의식적으로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처럼 기계인 '이영모 씨'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잘 달려야 한다는 생각을. 말이 안 되죠.  


저의 보험 특약은 10km 견인은 무상이고 km당 3천 원의 추가 비용이 드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토요일 꽉 막힌 강남 한복판에서 의정부까지 약 38km 정도를 천천히 달려왔고, 9만 원 조금 안 되는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40여분 거리를 3시간 가까이 걸려서 말이죠. 


비용을 지불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불편하실 것 같아 그러질 못했습니다. 1억이 넘는 새 차를 5년 할부로 구입해 이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갖 넘어간다는 '어부바'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 삼십대 초반의 기사님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묻지 않은 말이었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차 안에서 집 근처에 문을 열어 둔 정비소에 정비 예약을 했지요. 그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찌 보면 '시간이 돈'인데, 그 사람의 시간을 너무 쉽게 활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시스템상 거리당 비용뿐만 아니라 소요 시간에 대한 반영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어느 대학에 무슨 전형으로 어떤 틈새를 파고 들어가는 전략을 아무리 잘 짜도 말이죠. 나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면, 시스템을 고치려는 지속적으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지 못하면 사실 다 소용없는 전략이지 싶어 집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당신을 위해 쓰는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는 건 제대로 된 나라일수록, 의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나라일수록 당연하게 실천되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못하다는 경고등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미 들어오고 있으니까요. '어느 대학 갈래'하고 묻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될래'하고 아이들에게 묻는 게 습관처럼 되어 버린 게 그 이유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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