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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23. 2024

딸에 대하여, 실은 엄마에 대하여

[오늘도 나이쓰] 35

낮에 열아홉 따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닦아서 물기를 제거하느라 널어놨던 크고 작은 용기들 짝을 맞춰 놓은 겁니다. 처음에는 부탁을 해서 했는데, 이제는 곧잘 알아서 해주네요. 꽤나 신경 쓰이는 쉽지 않은 가사노동 중 하나잖아요.


인간이 먹고사는 중에 아마 가장 어려운 게 '아는 대로 그때그때'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만 하면 무슨 일이건, 별 탈없이 잘 지나갈 텐데 말이죠. 그런데 그것만큼 또 어려운 게 없지 싶어요. 몰라서가 아니라 모른 척하며 외면하고 지나치는 게 더 쉬우니까요.      


얼마 전 그 따님이 빨간 머리로 염색을 하고 왔어요. 5월 햇살에 비추면 영락없이 잔 내부를 흘러내리는 적포도주 색깔입니다. 아내는 '자기야~ 얘, 빨간 머리가 되었어.' 하며 함박 미소를 지으면서 따님의 짙은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흔들어 보입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난다는 건 흐릿하더라도 '전조 증상'이 대부분 있습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 신호를 보내는 거지요. 시그널입니다. 감기가 오려면 목이 칼칼해지고, 마음이 요동치면 꿈을 자주 꾸듯이 말이지요. 때론 신호등처럼 선명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지나친 뒤 한참 뒤에야 앨범처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에게 따님의 염색은 그런 시그널로 읽힙니다. 며칠 전 오랫동안 홀로 준비하던 두 번째 시험을 치른 후 가장 먼저 한 게 염색이라네요. 수고한 자신을 위한 자기 위로라면서요. 이제 곧, 떠나가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는 시그널입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한 생명이 다른 한 생명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몰라서 낳는다고 했던 은유 작가의 말처럼. 그렇게 놓고, 그렇게 태어나 꼬물거리던 따님이 '미약한 인간'의 태를 벗고 자기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시그널입니다.  


따님의 시그널 덕분에 열다섯, 열여섯 때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보냈던 저의 시그널이 떠오릅니다. 세 들어 살던 단칸방에 달린 천장 아래 다락방. 얇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알루미늄 방화복을 온몸에 두른 듯 땀을 흘리면서도, 이글루 속 한기에서 오히려 포근함을 느끼면서도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던 제가요. 


광산노동자 아버지의 자랑이었(다)지만, '어머니'의 커다란 걱정이었지요. 큰 수술을 받은 얼마 뒤라, 바짝 마른 몸이라, 코피에 축농증에 반복되는 변비를 달고 사는데도 죽어라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만 하(려)는 장남이요. 


하지만 열다섯의 저는 시커먼 동네에서, 슬레이트 지붕아래 단칸방에서 (나 혼자라도 일단)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확신을 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저의 십 대는 동생과 달리 집안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공식적으로 외면하고 떨어져 지낼 있었구나 싶어집니다. 


부모가 되어 부모처럼 사는 흉내만을 내어 보려고 하는 대목마다 말이지요. 스물 하나 아드님이 태권도의 영향으로 지금껏 '아버지'라고 부르는 동안, 따님이 열몇 살이 넘어서면서부터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마음속에서 계속 쌓여만 가는 죄의식의 분비물을 조금이라도 희석시켜 보려는, 또 나 혼자만의 마음으로.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_김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코로나가 절정이던 몇 해 전. 열여덟 아드님이 혼자 태평양을 건너간다 할 때 '엄마'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너는 그래도 기차 타고 서너 시간만 달려가면 만져 볼 수 있었는데....'. 이 말이 자꾸 떠올라 아직 따님도 비행기를 탈거라는 것을 '엄마'한테는 말씀 못 드리고 있네요. 따님이 공부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불러다 점심을 직접 만들어 먹이면서, '적당히 해, 너무 애쓰지 말고'를 좋아하는 노랫말처럼 반복한 '엄마'한테요. 그러면서도 '아, 나도 우리 딸 따듯한 살갗을 만질수가 없어지는 거구나' 싶어집니다. 


살아 보니 한번 가면 그때의 아이로, 그 부모로 못 돌아옵니다. 그래서 더 명확하지 싶습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제 용기에 딱 들어맞는 뚜껑을 찾아 맞출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이라는 것을요. 만질 수 있을때 많이, 오래 만져야 한다는 것을요. 이런저런 마음 쌓아 놓지 말고, 물기가 곰팡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잠깐) 멈칫했다가 얼른 그 마음 열고, 닫아 주자는 것을요. 그게 자식하고 부모가 다른 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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