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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29. 2024

#이해할 때의 아름다움

[오늘도 나이쓰] 36 ... pixabay

우리 반 리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고3을 정말 잘 보내겠다는 다짐을 지켜내려 애쓴다는 내용이었는데 끝부분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라고 마치고 있었습니다. '어, 내가 그랬었나?' 싶었지요. 고3이 되고 난 후 내내 리는 우리 반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유일한 학생이었습니다. 좀 굵은 검은테 안경까지 쓰고 있어 안 그래도 자그마한 맨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체육대회 날에도 말입니다. 그랬던 리가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찾아왔는데 느닷없이 마스크를 벗고 맨 얼굴로 온 겁니다. 저에게는 느닷없었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그 나이, 그때에 맞는 얼굴, 딱 그거였거든요.


나중에 상담을 할 때 마스크를 쓰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학생들은 우리 따님처럼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마스크를 자주 씁니다. 여리는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의 알레르기도 있고 선천적으로 호흡기가 약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듣고 나니 평소 여리가 많이 피곤해 보이고 체육 시간에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았구나와 연결되어 보였습니다. 볼 일을 보고 나가는 여리한테 '맨 얼굴'을 봐서 좋았다고, 이제야 우리 반 여리구나 하고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그 말이 고마웠다는 겁니다.  


여리의 감사 메일을 새벽에 읽으면서 문득 1984년 3월 2일이 떠올랐습니다. 중학생이 되던 첫날이었습니다. 산과 산 사이 중턱에 위치했던 하얀 건물 안으로 꽃 피는 것을 시샘이 아니라 아예 막으려는 듯한 찬 바람은 창문을 흔들면서 불었습니다. 차디차게 퀭한 복도 가득 윙윙거리던 바람 소리가 기억납니다. 시야에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하얀 눈과 교탁 앞에 서 있던 낯선 선생님의 검은 장갑과 점퍼가 겹쳐 들어왔습니다. 


그날 그 선생님으로부터 '복도에 나가서 깨진 창문 개수'를 세어 들어오라는 명령 같은 지시를 받았습니다. 시킨 대로 했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불려 나가 '따귀'를 맞았습니다. 저의 오랜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나 몇 번이나 머릿속을 더듬거렸습니다. 하지만 방금 꿈을 꾸었다 깬 것처럼 여전히 선명합니다. 교실의 냉기, 손바닥의 온기, 바람 소리까지. 


지금 제 나이 즈음의 담임 선생님의 손바닥은 따듯했습니다. 방금 송곳으로 눌러본 듯 군데군데 벌게진 손바닥도 선명합니다. 난생처음 '이빨 깨물어'란 이야기도 또렷합니다. 이를 깨문다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던 열넷이었지만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 이유를 듣지도, 묻지도 못했습니다. 지금에도 아직 그 이유를 장면이나 소리만큼 선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당할 때만큼 당혹스러운 건 없지요. 쇼펜하우어도 그런 일이 있었나 봅니다. 매우 자제하고는 있지만 피비린내날 듯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입으로 퍼붓는 모욕에 대하여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고 용납할 수 없는, 따라서 여기서 운운하는 것조차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양해시켜야 할 정도로 두려우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고 세상에서 제일 흉악하여 죽음이나 영원한 신의 형벌보다도 감당키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조차 두렵지만 남의 뺨을 때린다거나 주먹질을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로서 자기의 명예가 송두리째 짓밟혀 버리며 그의 다른 모든 명예의 상처가 단지 상대방의 피만 보면 씻어지는 것과는 달라서, 이 경우에 명예의 치명상에 대하여는 상대방을 죽여 버리는 도리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명예 회복의 점진법으로 뺨을 맞았을 경우에는 회초리로, 회초리에는 몽둥이로, 몽둥이에는 얼굴에 침을 뱉음으로써 보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는 충분한 명예 회복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피를 보는 최후 수단을 취할 수 있다." _ <쇼펜하우어 인생론>(쇼펜하우어/최민홍, 2023, 집문당)



첫날의 일은 저에게도 늘 따라다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덕에 제 인생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확실해 배웠네요. 사건 이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나 말이죠. '그렇게 살지는 말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어떤 모습으로 살지는 말아야 할지는 어렴풋이 그 사건이 알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자주 생각해 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어쩌면 영원히 어려울지도 모르는 것이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라고 말이지요. 입장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모르니까요. 바꿔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시도만이라도 한다면 인간사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 아닌 전쟁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여리가 가진 거친 꿈이 잘 다듬어지고 정교화되는 데는 저처럼 '어쩔 수 없이 매일' 봐야만 하는 어른들로부터 응원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부모여서 (나이는) 어른이어서 말이지요. 매일 저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이것저것 쉽지 않다면, 입장 바꾸기가 쉽지 않다면, 입장 바꿀 시간조차 나지 않는다면, 적어도 폭력적인 상황만은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 그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제자리를 잘 찾아와 앉아 있는 여리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 몸도 마음도 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텐데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린 사람들을 보면서 다짐합니다. 어리다고, 모를 거라고, 경험이 없다고, 그림을 모른다고 지레 짐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 자리를 잘 지켜내 어른스러움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게 가장 아름다운 어른스러움이라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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