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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31. 2024

좋은 어른

[오늘도 나이쓰] 37

하루를 잘 보낸다는 말속에는 분명 꽤나 많은 규칙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정한 것과 타인이나 시스템에 의해 정해 것들. 규칙적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기계적'인 반복을 의미합니다. 운전하는 어른, 보행하는 남녀노소들이 거의 매일 의지하게 되는 신호등처럼.  그 신호등이 요즘은 바닥에 번쩍이는 LED 표시뿐만 아니라 신호등 아래 다음 신호로 바뀌는 소요 시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도로에서 가끔 비보호 좌회전을 만납니다. 보통은 통행량이 적은 곳에 지정되어 있지요. 어제 하루 만에도 몇 번을 만났지 싶습니다. 앞에 오는 이들과 수신호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움직이면서 가끔 생각해 봅니다. 통행량이 많은 복잡한 오거리라도 비보호 좌회전으로 서로 더 안전하게 빠르게 자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고요.


오늘의 삶 속에는 신호등처럼 명확한 예고가 되어 있지 않은 사거리, 오거리들을 정말 자주 만나니까요. 신호등에 의지하지 않은 채 상황을 스스로 완벽하게 판단해야 하는 지점, 시점들을요. 그러면서 생각해 봐요. 보호해 주지 않는다, 는 말속에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주체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그 지점, 그런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도 지켜질 수 있다는 사회적 협업을 강조합니다.  



붉은색 푸른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내 머릿속을 텅 비워버려 내가 빠른 지도 느린지도 모르겠어 그저 눈앞이 샛노랄 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차라리 운전대를 못 잡던 어릴 때가 더 좋았었던 것 같아

그땐 함께 온 세상을 거닐 친구가 있었으니


건반처럼 생긴 도로 위 수많은 조명들이 날 빠르게

번갈아 가며 비추고 있지만 난 아직 초짜란 말이야  

                                                                       - 이무진 <신호등> 가사 중 일부



지금은 킥보드를 둘, 셋 같이 타고, 터덜 터덜 일부러 느리게, 헤드셋을 하고 쎈 척 벌건 신호등을 무단으로 건너면서 같이 있음을 과시하지만. 열아홉 따님이 자주 흥얼거리는 노랫말처럼, 언제나 영원할 것 같은 이들은 각자의 사거리, 오거리를 찾아 떠나갈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된 단 하나가 이 진리이니까요. 잃고 나서 알게 된 지혜이니까요.


꽤나 후텁해진 바람을 셋이서 함께 맞으면서 걸었습니다. 집 앞에는 열아홉 참새가 지나치지 못하는 달달한 24시간 방앗간이 생긴 지 오래입니다. 그곳을 향해 걷는데 참새가 그럽니다. 이러쿵저러쿵 조잘 재잘. 저도 그랬습니다. 아빠도 그렇다고. 참새가 냅따 그럽니다. "그러니까 아빠는 어른이잖아요."


아내가 추천한 '사당해'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드는 생각이 하기 싫고, 귀찮고, 힘든 건 10대나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어른이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한없이 흩날리던 벚꽃눈을 오월말 즈음에는 다시 한번 기억해 수 있는 어른이었습니다. 다음 해, 그다음 해까지 벚꽃이 반드시 다시 찾아올 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어른이었습니다. 따님 덕에 다시 생각합니다. 좋은 어른이란 무얼까 하고.



 "좋은 어른이란 사과를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떨어져 걷고 있는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말은 '사랑해'라는 말보다 '미안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박애희, 2020, 수키)>



앞에서 밀려오는 타인들에게 먼저 가라 손짓합니다. 그러는 동안 생각해 봅니다. 번아웃 되지 않게 일과 휴식을 적당히, 먹고 마시는 양을 적당히, 움직이는 양을 적당히, 말하기와 듣기를 적당히, 선택과 집중을 적당히, 낮과 밤을 적당히, 읽기와 쓰기를 적당히. 일상에서 달달한 것들을 찾아내 해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그런 사람. 그 눈으로 어린 사람들에게 비보호 사거리, 오거리에서 자신과 타인을 함께 보호하는 연습을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벚꽃눈이 다시 날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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