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un 07. 2024

스스로 흡족하게

[오늘도 나이쓰] 39

요즘 하늘이, 공기가 며칠 내내 '최고 좋음'입니다. 구름 구름한 하늘이 휴대폰 화면에 비추인 것처럼 온통 파랗습니다. 눈에 들어차는 산과 들, 동네 산책로는 점점 더 진한 초록으로 두꺼워지고요. 가라앉을 뻔한 기분도 쏙쏙 골라 끄집어 올려 줄 것만 같은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네요. 요즘 같은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셔 몸에 충분히 저장을 해두면 좋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1년 만에 어제 귀국 예정이었던 스물 하나 아드님이 비행기를 타지 못했습니다. 출발 이틀 전부터 갑자기 잇몸에 염증이 다발성으로 번져 응급실을 다녀왔다고 하네요. 평소 성격에 외국인 신분으로 10시간 대기후 타이레놀 정도 처방해 주는 게 기본 시스템이라는 그곳 병원을 늦은 저녁에 스스로 간 걸 보니 통증이 표현하는 것의 서너배 정도는 되었지 싶네요. 화창한 낮에 통화한 아내의 목소리가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오랜만에 의자에 앉아 창문 끝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열일곱부터 서른 하나 결혼할 때까지 혼자 살았던 저의 기억이 가물거리더군요.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휑한 게 여러 날 이어지면 몸에서 나타나던 반응이 바로 입병이었다는 사실도. 구내염이 생기고, 그 옆에 또 생기고, 사라지다 다시 생기고. 원래 먹는 게 어설픈 데 입병까지 도지면서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몸과 마음의 악순환이.


부모여서 미안해질 때는 무엇보다 '죄다 나쁜 것은' 다 닮아 자식이 아플 때입니다. 몸도 마음도. 좋지 않은 것만 물려줘서 그런 것 같을 때는 더욱 아픕니다. 입병이 자주 나는 것도 코피를 자주 흘렸던 것도 배려하느라 늘 손해 보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것도 결정하느라 옆 사람 진까지 빼는 것도 감정이 없는 것처럼 자기를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듯 하는 것도 슬픔을 속으로 삭이는 것도 구강 구조도 말투도 사람 좋은 듯한 미소도.   


아드님은 지금 대학을 1년 마쳤습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 중인데, 원래 더 하고 싶었던 과를 찾아 전과를 할까를 고민 중인가 봅니다. 차고를 개조한 원룸에서 혼자 숙식을 해결하면서. 식당 주방 설거지 일을 주 3회, 하루 10시간씩 하면서. 이번 여름 방학을 끝내고 출국할 때 따라나서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 공부를 시작할 세 살 아래 여동생의 진학 관련 현지 정보들을 공유하느라 낮밤을 거꾸로 보내면서 더 그랬지 싶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좋은 파란 하늘을 가끔 올려다는 봤을까 모르겠습니다. 며칠 동안 감탄하며 살고 있는 이곳 하늘보다 더 높고 더 푸른 하늘을. 걱정이 쌓이고,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하고, 결론지어지지 않은 고민들을 집에서 강의실로 버스로 도로로 이어 달리기를 해야 하고 서서 몇 시간씩 접시는 닦아야 하고 손가락을 베고 물에 불어도 시급이 좋다며 너스레를 떨면서 거의 하루 먼저 앞서 사는 부모를 안심시켜야 하기에.


아내도 다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손사레를 치는 '20대'입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지나 와 돌아보니 그렇더라는 이야기는 20대에게, 자식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날 좋은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돌멩이 같은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한마디 더 얹는다고 위로가 되고 힘이 나는 건 '어찌되었건 잘 지나온' 가진자들의 여유일테니까요. 결과론적 책임감으로 포장된 사회적 압력에 달짝이는 입술을 슬쩍 얹을 뿐일 겁니다. 


"맑은 날 심호흡을 해서 마음에 저장해 둔 맑은 공기로 흐린 날 하루를 잘 버티는 습관을 기르기,  진짜 자기를 찾기, 나부터 챙기는 습관을 가지기, 아무리 바빠도 제대로 운동하기, 솔직하게 표현하고 유머를 잃지 말기,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기,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자기 먼저 알아차리기, 주변의 조언과 근심, 걱정, 위로와 격려에 섞인 원격 조정을 물리칠 힘을 기르기"라는 당부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신 아무리 바빠도, 시간이 없어도 건너뛴 끼니는 평생 다시 찾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끼라도 더 빨리 알아 악착같이 챙겨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마음을 이끌고 간다는 진리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돈 들이지 않고, 시간을 크게 쓰지 않으면서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운동 동작을 몇가지는 꼭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을 나서면 언제나 고개를 들고 앞을 보고 하늘을 보면서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을 보며 앉아 있을 때 의식적으로 어깨를 폈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한 것만 찾아내서 확신에 차서 확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속한 것보다 신중한 게 결과적으로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마음을 끌고 간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자신만의 운동 습관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하루를 기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록들이 자신의 삶의 소중한 보물이 된다는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록속에서 기억속에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들춰보며 비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느릿한 변화를 스스로 감지하는 기쁨을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정의 용솟음, 소용돌이, 해결 방법, 선택할 때 작동했던 기준치, 기억나는 이들의 특징, 말, 표정. 슬쩍 문 하나만 열어 본 기억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들어오는 바람에 잠깐 눈을 감아봤던 감정. 바람 속에 묻은 그날의 햇살, 온도, 냄새, 소리, 촉감을 계속 기록했으면 좋겠습니다. 


염증(炎症)마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포가 손상되는 초기 단계에 더 이상의 손상을 억제하고, 파괴된 조직 및 괴사된 세포를 제거하는 동시에 조직을 재생하기 위한 것이지요. 내 몸에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재생시켜 마음까지 살아내게 하는 겁니다. 어쩌면 염증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간만큼 우리도 나이들어 가는 걸지 모르겠습니다. 


다 나은 염증이 다시 돋는다고 해도 매일 열리는 아침처럼, 하늘처럼, 햇살처럼 괜찮습니다. 염증이 생겼다 낫는 시간 덕분에 몸과 마음을 살리는 요령이 생기는 거니까요. '무덤덤하게, 어정쩡하게, 다소 애매하게'. 이게 아드님이 얼른 가졌으면 하는 뚜렷한 목표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태도로 살아내는 시간이 얼른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들이 다시 또 한참을 지나 돌아보면 스스로 먼저 흡족해 했던 '최고 좋음, 꽤 좋음, 적당히 좋음, 좋음'의 시간들일 꺼니까요. 얼른 아드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이전 08화 #계란 삶는 동안만큼이라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