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은 마치 거대한 면접장같다. 면접관은 신(혹은 우주)이고, 이 면접의 최종 관문은 입사나 입학이 아니다. 바로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그런데 이 면접장에는 아주 독특한 규칙이 하나 있다. 대기실에는 오직 나 혼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족도, 친구도, 스마트폰도 없이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지는 시간.
사방이 고요하고 텅 빈 면접 대기실. 이때 외로움을 느끼는 ‘나’의 내면은 이렇다.
“아, 왜 아무도 없지? 너무 불안해. 누가 나 좀 봐줬으면 좋겠어. 내 이야기에 맞장구쳐줄 사람이 필요해.”
외로움은 ‘결핍’의 언어다. 마치 배터리가 1% 남은 스마트폰이 필사적으로 충전기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다. 나 혼자서는 전원을 켤 수 없어서, 타인이라는 전기 콘센트에 나를 꽂아야만 안심이 되는 상태다.
이 상태에서 신과의 면접은 매일, 매순간 불합격이다.
“너는 아직 ‘네’가 될 준비가 안 되었구나. 너를 정의하기 위해 타인이 필요하니까.”
외로움은 내가 나를 떠나있을 때 찾아온다. 내가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자꾸만 밖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 텅 빈 방에 누군가가 들어와 주기를 기다리는 고통, 그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고독을 즐기는 ‘나’는 다르다. 똑같은 텅 빈 대기실이지만 반응은 정반대다.
“드디어 조용하네. 이제야 내 목소리가 들리는군. 면접 들어가기 전에 내 생각을 정리해 볼까?”
고독은 충만의 언어다. 이것은 텅 빈 방이 아니라, 예술가가 걸작을 만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근 ‘작업실’과 같다.
고독한 ‘나’는 타인이 없어도 스스로 빛을 낸다. 남이 주는 위로가 아닌, 내면의 단단함으로 스스로를 채운다. 이때 신은, 오늘 새벽에도 미소 지으며 합격 도장을 찍어준다.
“너는 혼자 있어도 가득 차 있구나. 이제야 비로소 ‘너’답게 살 준비가 되었구나.”
고독은 내가 나와 가장 친해지는 시간이다. 세상의 소음을 끄고, 나라는 우주에 접속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이제 면접은 거의 다 끝나간다.
‘내가 되기 위한 신과의 면접’에서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네게 부여된 직함, 나를 받아 준 가족, 친구, 나를 밀고 당겨준 인맥... 이 모든 배경을 다 지우고 딱 너 하나만 남겨두었을 때, 너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맞다. 신이 ‘나’에게 가끔 철저한 혼자가 되는 시간을 주는 이유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타인의 부록으로 살지 않고 ‘내 인생의 저자’로 살 수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함이다.
외로움에 빠진 시간 동안에는 이 질문 앞에서 ‘제발 혼자 두지’말라며 애원한다.
고독을 즐기는 시간 동안에는 ‘영혼의 샤워’를 만끽한다.
그 시간을 ‘외로움’이라 이름 붙이면 ‘나’는 춥고 떨리는 텅 빈 방에 갇힌 피해자가 되지만, 그 시간을 ‘고독’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나’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여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나비가 된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텅 빈 방을 나만의 서재나 작업실로 꾸밀때의 설렘과 같다. 문 밖에서 누군가 와줄까 기다리며 서성이는 것을 멈추고, 방 안에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나’ 자신과 대화를 즐긴다.
이제 곧 면접장을 나설지 모른다.
혹시 지금 지독하게 혼자라고 느껴지나?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신과의 독대 면접 중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를 씻어내고 채우는 능동적인 시간, 이것이 고독의 본질이다.
결국 이 철학적 전환의 핵심은 타인에게 맡겨두었던 내 감정의 리모컨을 되찾아오는 것이다. ❤️
∙그리하여 고독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고독 덕분에 그의 생활은 대단히 충만하게 되었다.
_<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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