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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KOON Jun 20. 2024

남의 업계 싸잡아 비난하기

<드라이브>


인기 유튜버 유나는 예정되어 있던 큰 외부 행사 하나를 마치고 술에 취한채 차에 올라탄다. 한참 전에 부른 대리기사를 기다리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인 구형 캐딜락에 몸을 누이는 유나. 헌데 잠깐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정신 차려보니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운전석이 아니라 좁디좁은 트렁크 안. 납치된 건가?- 싶어지던 찰나, 트렁크 안에서 스마트폰이 발견된다. 그리고 걸려오는 전화. 낯선 목소리의 남자는 유나에게 6억 원을 주면 살려줄 테니 그 스마트폰으로 지금 당장 생방송을 켜 후원금을 모으라 말한다. 그렇게 시작되는 목숨을 건 생방송. 과연 유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간결한 전개에 확실한 컨셉은 분명 장점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 <드라이브>는 이곳저곳에서 개연성의 헐거운 부분들이 노출되며 관객들의 집중도를 깬다. 노파심에 앞서 말하지만, 장르 영화고 오락 영화이니 어느정도의 개연성 부재는 흔쾌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특히나 재미가 있었다면 그런 부분들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을 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드라이브>는 그 개연성의 부재가 너무 커 오히려 간신히 발동 걸리려던 영화적 재미의 발못을 뒷잡고 늘어진다. 그러니까, 넘어가 줄 수 있는 그 어느정도의 개연성 부재를 한참 넘어선 심각한 수준의 개연성 부재. 그렇게 <드라이브>는 제대로 시동도 걸어보지 못한채 자꾸 도로 위를 방황한다. 


전문 유튜버도 아니고 생방송을 진행해본 적은 더더욱 없을 뿐더러, 사실 그쪽 업계에 관해 나는 굉장히 문외한인 편이다. 평소 잘 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아도 <드라이브> 속 유튜버 및 스트리머들에 대한 묘사는 많이 빠지는 편이었다. 극중 트렁크 안에 갇힌 유나는 유튜브에서 생방송을 송출하는데, 그러면서 같은 스마트폰으로 동시에 경찰과 통화도 한다. 거기다 인스타그램으로 추정되는 SNS 플랫폼에서 송출되고 있는 매니저의 생방송을 동시 수신하기까지.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영화 초반 묘사되는 화장품 업체 주관의 외부 행사에서 원래 약속되어 있던 기성 방송국들이 갑작스레 불참통보를 했다는 지점도 현실성이 영 떨어진다. 세상에 어떤 방송국이 팀을 행사 직전 다 되어서야 보내는가? 보통은 행사 시작하기 반 나절 전에 도착해서 장비 내려놓고 방송 셋팅 해뒀겠지. 


방송 관련한 개연성을 다 빼고 봐도 쉽사리 납득가지 않는 전개들이 많다. 분명 좁디좁은 트렁크 안인데, 왜 유나는 그 안에 자신 외 다른 누군가가 또 함께 누워있었다는 걸 몰랐을까? 트렁크 안에서 그 난리를 치고도 영화 후반이 되기까지 전혀 몰랐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더불어 역주행하는 차량에서 트렁크 문을 열고 다른 주행차량들에게 유나가 목격되었는데도, 그 이후 경찰들이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 역시도 의아하고. 또, 진범에게 특정한 목적이 있었다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친절한 납치범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세상에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 부담 높은 복수 계획은 또 없을 거다. 납치범이 납치 피해자에게 스마트폰을 손수 던져주는 기이함. 심지어 칼도 넣어줬더라. 


하지만 <드라이브>의 가장 기분 나쁜 지점은 바로 결말이다. 물론 <드라이브>가 무얼 말하고자 했는지는 잘 알겠다. <드라이브>는 조회수와 후원금만 받을 수 있다면 설사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기어코,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하고야마는 현 시대의 여러 유튜버들과 스트리머들을 꼬집고 있다. 그것마저 말이 안 된다거나 시의성 없다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메시지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그러나... <드라이브>는 딱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주인공이 유튜버로서 과거에 행했던 과오들, 그리고 사건의 과정에서 인터넷 방송을 보며 모든 걸 그저 유희로만 치부하는 시청자들. 딱 거기까지만 꼬집었어야 했다. 헌데 <드라이브>는 결말에 이르러 구조된 유나가 구급차를 타고 가며 스마트폰을 통해 유튜브 메인 화면 속 여러 유튜버들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오히려 <드라이브>의 주제적 메시지가 퇴색되었다고 느꼈다. 건강하고 설득력 있는 비판이라면 언제든 꼬집어도 무방하다. 헌데 그런 상황과 세태만 꼬집으면 되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유튜브 메인 화면까지 띄워가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건 대체 무엇인가? 내가 유튜버가 아님에도, <드라이브>의 그 마지막 장면은 조금 불쾌하게 느껴졌다. 왜? 이제와서 유튜브를 비롯한 인터넷 방송 자체가 모두 다 썩어빠졌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근데 그러기엔 유나 너, 이미 인터넷 방송 하면서 돈과 인기 많이 얻지 않았었어? 또, 납치된 상황에서 트렁크 탈출법도 결국 그 유튜브 방송을 통해 알아냈던 거 아니야? 그런데도 인터넷 방송 자체가 마냥 전부 악하다고 할 수 있어?


세태를 꼬집는 건 괜찮지만 그걸 아예 일반화 시켜버리며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태도에 나는 불쾌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런 생각도 들더라. 아, 이것이 레거시 미디어인 영화가 유튜브를 비롯한 뉴 미디어에게 씌우고자 하는 프레임인가? 부실한 개연성들 사이에서도 그럭저럭 볼만은 했던 영화가, 결말의 딱 그 한 장면 때문에 불편해졌다. 남의 업계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건 아무래도 쉽게 할 일이 아니니까. 


<드라이브> / 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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