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산문집 <시와 산책>
너무 좋으면 나만 알고 싶기도 하잖아요. 한정원 작가의 첫 산문집 <시와 산책>(시간의흐름 2020)은 저에게 그런 책입니다. 이 책을 만든 편집자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출판사 서평에 “우리는 짓궂게도 이 무명의 작가가 결코 유명의 작가가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라고 쓰여 있답니다.
<시와 산책>은 작가 열 명이 제목으로 끝말잇기 놀이를 하는 ‘말들의 흐름’ 시리즈의 네 번째 권입니다. 열 권의 제목을 훑어보니 계주 경기가 연상되었어요. 모든 도서명이 두 개의 낱말로 되어 있는데요, 작가는 앞선 책 제목의 두 번째 낱말만 이어받고 새로운 낱말을 제시해요. 커피와 담배(정은)-담배와 영화(금정연)-영화와 시(정지돈)로 이어진 말들의 흐름에서 ‘시’를 받은 한정원 작가는 여기에 ‘산책’이라는 낱말을 더해요. 작은 방에서 홀로 조용조용 낭독해 보는 시처럼, 느릿한 산책처럼 잔잔한 파동을 남기는 이야기가 순하게 담겨 있어요. 좋은 문장을 읽으면 이토록 마음이 환해지는구나, 하고 감탄할 만큼요.
편편이 아름답지만 먼지 쌓인 곳을 비추는 알전구를 닮은 이야기 「과일이 둥근 것은」을 소개하고 싶어요. 작가가 동네 길고양이를 매개로 만난 과일 트럭 아저씨와 담배 아저씨와의 일화를 엮은 이야기예요. 이들은 서로의 신상을 묻지 않으면서도 곁을 내주는 사이가 되어요. '구석의 무명인들’끼리 주고받은 우정이 따뜻하게 전해집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p55) 마음이 둥글게 담겨 있어요.
저는 흐린 날을 다정하게 맞으며 "회색은 힘이 세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에 감탄하고, 산책할 때면 자신의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두며 고양이, 구름,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수집하며 걷는다는 대목에 공감했어요. 그리고 "덧정"이라는 단어에 눈이 오래 머물렀는데요, 사전적 의미는 ‘한곳에 깊은 정을 붙여서 그에 딸린 것까지 사랑스럽게 여기게 된 마음’이라고 해요. 작가에게 ‘시와 산책’이란, 바로 덧정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훗날 되짚고 싶은 문장을 표시하며 <시와 산책>을 읽었습니다. 몇 문장을 옮기며 이번 레터를 줄입니다. 맑고 단정한 문장에 기대어 부디 따스한 연말 보내시길요.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산책이 시가 될 때」 p25)
어딘가에 나의 메아리가 있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영원 속의 하루」 p73)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부치지 않은 편지)」 p169)
틈틈이 뉴스레터 26호 제목은 <우리는 이렇게 연말을 보내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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