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노니 Jul 06. 2020

영국 대학원 성적표

보건학 온라인 석사생의 첫 성적표

내가 수업을 듣는 학교의 보건학 온라인 석사과정은 크게 4개의 과제가 한 개의 모듈(과목)에 존재한다.

● Formative assessment 2개 (리포트 형식)

● Exam

● Summative assessment 1개 (에세이 형식)


포머티브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과제이며 점수에 포함되지 않는 과제이다. 그럼 왜 하느냐? 최종 과제인 서머티브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연습 과제이며 내 글쓰기 정도를 가늠할 수 있기에 학교에서 제공하는 자발적인 숙제이다. 그리고 학습내용 평가인 시험도 마찬가지로 성적에 미반영되는 자율적인 학습 능력 측정 도구일 뿐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서머티브 과제인데 이것은 에세이 형식이라서 리포트 형식의 과제보다 덜 형식적이지만 글의 논리구조를 갖춰야 하는 것은 똑같다.


아니, 그럼 그냥 마지막 과제나 하면 되지, 뭐하러 시간 아깝게 과제 2개를 굳이 하나?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을 굳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당연히 점수에 포함 안되고 향후 성적 처리되는 과제에도 영향이 미치지는 않지만 나의 학습 이해도와 마지막 과제를 향한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만 한다.


아직 시간도 없고 귀찮으니 안 해야지, 하는 생각이 없어서 그냥 넘겨본 적이 없지만 중간 과제를 통해 분명 배웠던 학습 내용을 상기시키고 더불어 완전히 내 것으로 습득이 된다. 왜냐하면,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긴 했으나 그건 그냥 활자였다.


예를 들어, 건강이란 무엇인가? 건강이란 솰라솰라입니다, 하고 지나간 개념에 대해서 건강이 무엇이고 우리가 현재 직면한 건강 문제들을 기술하시오, 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이 솰라솰라가 뭐가 들었고 그 안에 든 수십/수백 개의 논문들을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다시 빌려 써서 제출해야 한다.


빌려 쓴다는 것은 그들을 문장을 내 것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이며 표절을 하면 낙제점을 받게 된다. 표절을 확인하는 방법은 과제를 제출하면 자동으로 표절 %를 확인시켜준다. 50% 이상을 넘기면 자동 F(=Fail)이다.


점수제도는 미국/영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나 같은 토종 한국인에게 이 점수 체계는 매우 몹시 난해해 보였다. 쉽게 말하면 Fail은 우리가 아는 'F'이고 에프를 맞으면 망했다는 사실은 불변하다.

총 네 가지 영역의 점수 구분표

결과적으로 난 첫 번째 Formative 과제에서 fail 점수를 맞이했다. 고로, 망했었다. 그리고 한 이틀간 역시 내가 공부나 학위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먼 머리가 텅텅 빈 인간이라는 것을 되새김질하며 괴로워하는 한 마리 외로운 짐승이었다.


문법도 엉망이고 다른 것도 다 엉망이었으나 가장 큰 요인은 논리성이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앞뒤가 안 맞고 앞에 있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 제시가 부족한 게 내 F의 주 요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왓츠앱 채팅방에 많은 동기들이 함께 포효하며 그 괴로움을 달랬다. 그래도 첫 과제에서 낙제점을 받은 건 총 3명뿐이었고 난 그 대단한 순위 안에 들었다. 이러다 페일 당해서 첫 수업으로 종강하는 석사생이 되는 건가, 걱정이 돼서 어드바이저에게 나 마지막 과제 F 뜨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소상히 물어봤다.


"괜찮아. 한 번 더 제출할 기회가 있고, 제출기한은 2번째 모듈 과제랑 같이 내면 돼."

하고 쿨하게 얘기하시길래 아, 두 번째만 제출하면 무조건 그냥 패스구나. 그나마 다행이네. 했더랬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학교 프로그램 중 논문 작성법 강의와 1:1로 논문 지도해주는 박사과정생들과 연결되는 곳을 들어가서 아카데믹 글쓰기에 대한 강의를 정독하고 탐독하고 곱씹으며 두 번째 과제를 했더랬다. 그나마 두 번째 과제와 시험에선 페일 되지 않았고 pass 했다.


그리고 대망의 최종 성적이 반영되는 Summative 과제 제출을 앞둔 주말이 되었다. 내 영어실력을 도저히 나 자신은 믿을 수 없어 proof reading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나란 존재가 늘 그러하듯이 벼락치기로 시작해서 벼락치기로 마무리하며 제출 시간 2분 남겨두고 회사에서 부랴부랴 제출했다. 첨삭은 그저 동사나 단어의 문법 수정, 오타 수정만 확인받고 글의 개연성은 안드로메다로 날리고 완료 버튼을 눌렀다. 그 날, 밤 11시가 넘어서 회사 근처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로 들어가 취침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자 새벽부터 오전 내내 채팅창은 불이 났다. 페일 하면 어떻게 되는가. 2번째도 페일 하면 어떻게 되는가가 주요 화두였다.


아?! 그러네. 이 가혹한 채점의 세계 속에서 두 번째도 페일 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 결론은 두 번째 제출에서도 F가 뜨면 그냥 강제퇴학이다. 더 이상 모듈을 들을 자격이 없어진다.

으아?!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온라인이라며, 돈 주면 딸 수 있는 학위 아녔냐며, 다시 안내문을 확인해보니 역시 가혹하고 냉정한 점수의 세계였다. 와, 졸업하면 눈물 난다던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사이버대 나왔다고 하면 맞는 말이지만 돈 주고 졸업장 샀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화가 날 것 같다. 돈 주고 못 사니까 말이다. 불안감이 고조되었고, 그렇게 일주일을 초조함 속에서 보내고 드디어 대망의 성적 공개일이 다가왔고, 성적이 올라왔다는 알림 메일에 두근거리며 열람을 클릭했다.

학부 때 성적표도 이렇게 안 떨리며 열어 본 것 같은데 와, 이 박진감을 앞으로 12번을 겪어야 한다니, 후아.

이번 모듈에서 내가 받은 성적

다행히도 패스했고, 내 수준을 알기에 난 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것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모듈의 과제와 함께 병행해야 할 과제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남편에게 낙제는 안 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모듈 1 담당 교수님이 전체 메일을 보냈다. 내용인즉슨, 자신의 점수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에게 채점의 공정함과 객관성을 설명하며 덧붙여서 '그런 식으로 메일을 하면 안 됩니다.'라는 경고성 안내문이 있었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다소 억누르지 못한 고양된 감정을 메일에 그대로 표출을 했고, 그 멘트들을 하나씩 나열하며 '이런 식의 표현은 굉장히 무례한 표현입니다.'하고 가르침을 주셨다.


우여곡절 첫 번째 모듈이 끝났고, 지금은 두 번째 모듈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문과적인 과목인 '건강 개선'이 주제인 과목이다. 지난 모듈에도 보건학 개론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논점들에 대해 논리성을 잡아가는 게 여태까지 통계적이고 수치적인 결과들을 뽑아내고 기술했던 분야와 달라서 매우 난항을 겪었는데 이번에도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쩌겠나. 내가 선택했으니 따라가야지. 이번 과목은 에프 없이 메리트까지 받아보는 기염을 토하기를 바라본다.

이전 07화 과제 제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