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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Jul 12. 2020

[출간전 연재] 희귀한 직장들의 공통점

전 직장과 현 직장의 공통점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고민이 생긴다.

이 일이 내게 맞는 옷인가, 나는 고용주가 원하는 실적을 내고 있는가, 향후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가 등등 흔히 할 만한 고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직장'들'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었고 그래서 내가 '복 받은 직장인'이라고 자부하며 위의 고민들 속에서도 나름 행복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용주의 특징

전 직장인 보건 연구(환경 역학)의 고용주는 PI선생님(연구책임자)이었다. 연구도 프로젝트이며 정부기관에서 주는 연구사업비를 받아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하기 때문에 해당 연구 인력으로 고용된 경우다.


선생님은 늘,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행복하게 연구를 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질병상태의 사람을 다루는 병원과 그저 일개 봉사단원이었던 시절엔 들어볼 수 없는 캐치 프레이즈였다. 그저 돈 받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삐그덕 거리지 않게 잘 조율해서 알아서 맞춰야 했던 지난 시간들과 다르게 나의 책임은 강화하면서도 부담은 덜어주셨다. 퇴사 후에도 대학원 추천서 부탁에 친히 영어로 작성해 주셨다.


연구가 원래 이런 환경인가?

싶어서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1%의 케이스에 든 것이고, 다른 교수님들 밑에서 동일한 전공(보건학)으로 석사/박사를 수학한 선생님들도, "PI 교수님(선생님/박사님)한테 잘리지 않을까 봐 항상 '을' 중의 을이 되어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죠." 했다. 희귀한 케이스에 속한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있던 기관의 PI선생님들이 대개 좋으신 분들이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간혹 존재한다.



결혼 때문에 중국으로 이주를 해야 했기에 사직을 할 때 나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애인과의 이별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남편 될 사람이냐, 꿈같은 연구생활을 안겨준 PI선생님이냐, 하는 고민이었다고 후에 선생님과 남편에게 얘기했을 정도로 머리가 빠지도록 고민하던 나날들을 보내고, 결국 1년 2개월여 만에 퇴사를 하고 중국으로 갔다.


중간중간 논문을 쓸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시고, 안부도 물어봐 주시면서 언제 다시 만날까요, 하다가 명절에 남편이랑 같이 가서 식사도 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간 다시 한국에 정착할 때, 선생님이 내가 필요하다면 다시금 그 밑에서 일하고 싶은 게 염치없는 장래희망이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엉겁결에 국제보건 분야로 취직이 되어 버렸다.


'그래, 이것도 3년 안 되는 기간이고, 계약직이니까 이쪽으로 일하려는 청년들은 많으니까 내가 계속 일할 형편이 안 되겠지. 내가 국제개발협력으로 아예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도 아니고...'

하며, 덜컥 수락하고 일을 시작했다.


웬걸, 여기도 만만찮은 분위기였다. 목적과 길은 달랐지만 뉘앙스는 매우 흡사했다.


파견을 앞두다가 코로나로 파견이 연기되어 남편과 트러블이 있었다. 나는 무모하게 가고 싶다,였고 남편은 정신 차리게 와이프여,였다. 그랬다. 일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가족의 생각을 무시하고 돌진하는 진격의 황소가 되었던 것이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내가 잘못했다고 사과), 대표님과 면담하면서 사실, 남편이랑 이러이러해서 파견은 상황이 더 안정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고, 그렁그렁하게 말씀을 드리니, 당연한 걸 가지고 왜 싸우냐고 도리어 혼이 났다.


우리도 보내고 싶어도 남편과 가정이 우선이며 그래야 당사자가 행복하고 건강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절대 싸우지도 말고, 기관 때문에 싸울 것 같다 싶으면 무조건 가족 편을 해라 그렇게 해도 회사에선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 가정의 평화를 우선하라고 말이다.


당연한 말인데 한국의 조직에서 쉽게 들어왔던 말들이 아니라서 이럴 때마다 좋은 꿈을 꾸어도 로또가 안 되었던 까닭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일이 적다는 것은 아니다. 일은 항상 차고 넘치는 성질의 것이다.


동료들의 특징

이건 첫 직장부터 쭉 이어져 온 공통점이다. 좋은 사람들. 모나지 않고 각기 개성 넘치는 사람들. 배울 점이 많은 선배와 동기들. 같은 분야건, 타 분야건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였다는 얘긴 윤리의식 모자란 현지 직원들과의 트러블 때문이었지 그 외 다른 일들에선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비율이 현저히 적었다.


그 스트레스도 사람이 으레 다른 성격의 사람과 어우러지면서 겪는 과정이니 그리 오랫동안 힘들 일이 없었다. 남편이랑도 평생 그런 류의 스트레스는 있을 테니 그건 나같이 둔감한 사람에게 그다지 '스트레스'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들 참 신실한 종교적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대개 크리스천이지만 불교, 가톨릭 신자인 분들도 있었다. 편견 많은 내게 다양한 종교 신자들이 종교의 장점만 보여주면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늘 보기 좋았다. 왜냐하면 내가 딱 그 반대의 사람같이 행동해서 그렇다. 나일론 개신교도...


덕분에 대학생 때까진 열등감이 많고 낮았던 자존감이 직장생활을 통해 개선되었다. 브런치든 어디 게시판이든 사람들은 회사생활을 통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 하는데 감사하게도 역주행을 하고 있다.


한 번은 전 직장에 있으면서 대학원을 준비한다는 얘길 들은 주변 동료 선생님들이, 선생님을 누가 안 뽑아가겠느냐, 다 될 거라고 골라 가면 된다고 하셔서 근거 없는 자만심이 충만해 가지고 한 곳만 지원했다가 떨어지니 그 교수 이상하다고, 손해 보는 연구실이라고, 선생님 연구할 시간 많이 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토닥토닥해주셨다. 다음 해가 되어 붙으니 역시 그거 보라며 담당 교수가 반년 동안 인재를 놓쳤다며 한도 끝도 없이 어깨를 올려주셔서 몸 둘 바를 몰랐던 시간이었다.


참고로 선생님들은 대부분 SKY 출신이시고, 기본 석사 이상이신 분들이셨다. 다른 친구의 직장생활에서 석사생들이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조금 힘들다는 얘기를 들으며 이것도 참 운이 좋은 거구나, 싶었다.


급여

하나같이 적다. 고용주가 좋은데 왜 급여가 적냐는 모순이 있지만 고용주의 직접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들이 아니니까 할 말이 없다. 동종업계 사람들이 받는 거에 비하면 늘 평균 이하였지만 이전 직장보다 조금씩 상승하긴 했다. 새로운 일을 하는데 마치 경력 산정받은 것처럼 올라서 그냥 근로계약서에 사인했다.


같은 직업, 직장을 다닌 동생은(간호사, 봉사단원, 연구간호사-이 웃긴 평행이론은 아직 작가의 서랍에 잠자는 중) 돈이 붙는 애라서 그런가 항상 나보다 30만 원 이상은 더 받고 계약한 것 같다. 4년 동안 물가상승률을 고려해도 얘는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받고 다녔다.


고용안정성

병원 삼 교대 간호사를 제외하곤 모두 계약직이었다. 그것도 무기계약직이 아닌, 그냥 1년짜리 계약직. 고용안정성이라니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한데 좀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연구원도 연구사업이 있어야 하고, 개발협력 활동가도 프로젝트가 있어야 돈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장에 나가야 한다. 재밌는 사실은 연구사업도 끊기면 안 되고, 프로젝트도 끊기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업 하나에 딸린 식구가 나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구는 중간에 연구비가 끊기면 다른 연구가 통과될 때까지 기관 내 다른 연구사업으로 이름만 올려두거나 학교 쪽에 단기 계약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다.


개발협력도 현장 사업장이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서 직원들의 고용기관이 5년 이상일 경우엔 기관 내 후원금으로 급여를 주면서라도 연속성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바로 다음 사업을 따 내야 한다. 그 기간 동안 한국인 프로젝트 관리자의 급여는 기관 내 다른 사업에 들어가 있거나 다른 단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식으로 밥벌이를 하면 된다.


왜냐하면 프로젝트는 계속 있어야 하는데 기존에 일하던 사람만큼 일을 하는 사람을 원하는 기간에 찾기가 힘드니 한 번 계약을 맺은 잘 아는 직원이 다른 곳에 정착하지 않도록 붙잡아 두어야 하기 때문인 셈이다. 고로 언젠가는 다시 그 기관의 동일한 고용주 밑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가능성이 높다. 고용주가 작정하고 나를 싫어한다고 권고사직하는 것이 아닌 사유라면 말이다.


의문점이 드는 것은, 만약 다른 프로젝트에도 인력이 꽉 차서 급여를 못 받게 되거나 단기 프로젝트나 채용 프로그램이 없어서 돈을 못 받는다면? 그럼 다른 일을 알아보면 된다.


같은 일을 못 찾으면 어떡하고, 그러다가 새 프로젝트로 들어오라 했는데 못 들어가면 어떡하나? 그럴 때 4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간호사 면허가 입에 거미줄 치지 않게 도와줄 것이라는 강한 신뢰가 있다. 지금은 장롱 속 먼지와 한 몸이 된 내 면허가 곧 빛을 발하는 순간이 저 때이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렇게 되면 너무 우울해지지 않을까, 나이 들어서 오랜만에 감각 떨어진 교대 업무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왜인지 별로 되지 않는다. 실제로 기관의 다른 간호사 출신 과장님도 회사에 있다가 병원에 갔다가 왔다 갔다 하신 적이 있다. 여기 있는 간호사 출신들이 비슷한 사고방식과 성격을 가진 건진 몰라도 나도 임상에 다시 가서 일하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게 그다지 무섭지는 않다. 안 맞는 곳이 있다면 외래로 가거나 다른 업무 하면 되지, 간호사가 꼭 병원에 있어야만 한다는 법이 없다는 걸 적지 않은 시간을 통해 알지 않았는가.


고로, 굶어 죽지는 않으면서 스트레스 덜 받는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을 은퇴할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고용안정성이 있다고 느낀다(주관적).


결론

위의 조건들로 인해 나는 원래도 타인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 성격인 데다 더더욱 그런 성격이 형성되게 환경이 조성되니, 남는 건 '근자감'이다. 그러다 보니 먹어가는 나이에 비해 애매한 조각 경력(계약직)뿐인데도 이상하게 불안감이 없다.


얼마 전 고향 친구와 만나서 이직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계약직'을 추천했다가 서른 줄에 계약직으로 가면 계속 계약직밖에 안 된다는 얘기에 아차, 싶었다. 내가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언제까지고 가정 있는 기혼녀가 취업시장에서 승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는 현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한테도 믿을 건 지금 있는 1년짜리 연장 계약직일 뿐인데 심지어 현재 버는 남편의 급여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임에도 너무 당당하다.


"안 굶어 죽어. 내가 투잡을 뛰더라도 오빠가 취업시장에서 안 팔릴까 조마조마하지 않게 만들 거야."


, 하는 정말 근거가 없는 자신감만 간직한 채 살고 있다. 나도 이렇게 글을 쓰며 되새긴다. 어디 너 자신이 언제까지 근자감 뿜 뿜 하는지 지켜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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