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해도 될 일, 만드는 사람들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년 8월
최근 한 MBTI 검사에서 ENFP가 나왔다. 어릴 땐, 항상 I(내향성)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일을 하면서 성향이 바뀐 것인지.. 아무튼, 굉장히 활발하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가는 용두사미가 특징인 ENFP가 나왔다.
그래선지 하고 있는 일은 적지 않은데 그 사이에 또 일을 벌여놨다. 다시 말하자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만들어 버렸다.
일의 배경은, 현재 한국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들 중 나처럼 파견직인데 코로나로 인한 출국 지연이 된 다른 2명의 선생님들이 있었다. 다들 할 일이 있긴 했지만 현장에서보다 한국 사무실 일을 서포트하는 것이 더 큰일이 되면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즈음부터 스멀스멀 참을 수 없는 나대는 본능이 활개를 치면서 이일 저일 맡아서 하고 있다가 급기야는 사업 초기부터 구상했던 프로젝트로 인해 수집된 데이터를 가지고 논문을 써 볼까?, 하는 가당치도 않는 생각을 꺼내기 시작했다.
때 마침 전 직장에서, 얼마 전까지 소속이 없던 내게 소속을 제공해 주셨던 선생님(내가 중국에 있을 때, 본인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받아주심)과 연락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이 해 줄 수 있노라고 말씀해 주셔서 덥석 그 손을 잡았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게 좋지, 하는 생각으로 파견되지 못한 같은 처지의 선생님들을 불러서 이야길 나눴다. 들어보니 다른 두 분 선생님들도 보건 쪽으로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연구가 뭔진 모르지만 현장에서의 결과물을 잘 수집해서 성과관리로도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길 하면서 주 1회씩 공부하고 결과물을 내보자고 꼬드겼다.
본인이 담당하는 사업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만큼 사업에 대한 혜안이 깊어지고 관련 분야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져서 결국 사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텐데, 라는 욕망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이러한 내용에 대해 대표님께 컨펌을 받아 하나의 연구 세미나를 만들었다.
일을 벌인다고 벌렸으나 별 건 없고,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내용의 기존 논문들을 리뷰하고 정리해서 내 사업의 데이터에서 어떤 논문이나 성과물을 만들어볼까, 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본격적으로 대표님의 허락과 자문 선생님이 화상으로 회의에 참석해 주시면서 그럴싸한 연구 모임으로 발돋움했다.
사실, 국제개발협력에서 주로 다루는 이슈들은 내러티브 한 보고서 형식의 성과물이나 회계 행정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 메인 일이기 때문에 연구나 학술적인 활동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가 있는 실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앞서 언급한 일들만 해 나가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장 파견자들이 한국에 있으면서 현장에서의 사람 만나고 문화에 적응하고 언어를 학습하는 시간들이 줄어들어 이러한 연구를 구축해 볼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해 볼 수 있어 나는 그 틈새를 사용해보고자 했다.
사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프로젝트 매니저나, 오피서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아 앞으로도 공부할 기회와 본인의 성과를 생각한다면 연구를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욕심을 내자면 기관 안에서 이러한 연구업무도 새 로오는 프로젝트 관리자들의 업무로 자리 잡아 다른 NGO에서는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돋보이는 시스템과 인력들을 배출하는 기관이 되게 하고 싶다는 나만의 빅픽쳐도 있었지만, 일개 계약직 직원이 주제넘게 하는 생각 같아서 약간 접어두었다.
그렇게 8월부터 지금까지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정말 성실하고 열심히 데이터를 구축하고 계신다. 나는 파트너 기관 안에 따로 데이터 센터가 존재해서 제공해 주는 자료들로 소정의 결과물을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러 논의할 부분들이 많지만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하면서 작성 중이다.
다른 두 분의 선생님들도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고 있어 벅차게 감사하다. 기존에 데이터가 있던 곳은 이를 잘 정리하여 출판까지 해 보려고 작업 중이며, 다른 분은 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도, 물도 없어서 설문지 하나 출력하기 어려운 곳에서 그곳의 문화와 관습에 맞는 것들로 사업 내 설문지를 만들고, 번역하고, 설문지 타당도를 검사하며 굉장히 수고로이 일하고 있다.
결과물이 만족할 만큼 좋은 것이 나와 각자의 필모그래피에 하나씩 채워질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일을 시도해 봤다는 것만으로도 사업과 기관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이었다면 족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