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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Nov 13. 2020

[출간전 연재] 국제개발 초짜의 프로젝트 제안서 쓰기

국제개발협력 6개월 차에 제안서 제출하기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년 7월.

중소기업일수록 경력직 신입도 별의별 일을 한다지 않던가.

지난 6월부터 나를 괴롭히던 몽골 코로나 지원사업의 제안서를 쓴 것이 그러한 업무 중 하나였다.

내가 안 해도 되고, 기관에서도 굳이 내가 안 한다 그래도 쫓아내지도 않을 터이니 안 해도 됐으나 성격상, 해내려고 하는 묘한 책임감이 있어가지고 결국 해냈다.


일주일 만에 쓰고, 현장에선 문서 작업이 어려우시단 이유로 전화 소통으로 제안서 작성하고 컨펌받고 컨소시엄이라 다른 기관과 화상회의로 내용 확인하며 고치고 또 고쳐가며 제출했다.

올해 안에 끝나는 단기사업이고 긴급구호 성격이 강해서 사실 그다지 복잡한 수준의 보고서는 아니었으나 간소하게 해 준다는 갑 기관의 구라 때문에 고생을 했다.

간소화는 개뿔.

욕을 하면서 몇 십장을 휘갈기며 써 내려갔다.

물론, 나 혼자 한 것은 절대 아니고, 결국 한국 사무실에서 해당 사업을 맡게 될 대리님이 내가 휘갈긴 얼룩들을 말끔히 정리해주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업은 수월하게 통과했고, 결국 사무실 정직원인 선임이 현재 모든 일을 관장하며 진행 중이라 나는 다시 본업인 방글라데시 프로젝트로 돌아왔다.


이번 프로젝트가 어려웠던 이유는,

새하얀 도화지에 연필인지 물감인지 모르는 재료로 뭔가를 그리라고 하달받았으나 무엇을 그릴지 감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다고 내 맘대로 그리면 종이만 버리게 되니 그건 안되는데 심지어 그 종이가 4절지도 아니고 운동장만 한 벽화를 그려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 그려나가는 거랑 잘 맞춰서 그려야 하는 일이었다.


망망대해를 지나가야 하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경로에 내버려진 제안서 작성은 4B연필로 실선을 그리면서 시작했다.


코로나-> 의료물품지원-> 방역물품 뿌리기->방역체계 구축이라는 로드맵을 그리며 써가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지역과 수혜기관 수는 현장에 계시는 지부장님과 소통하며 쓰는데, 가본 적도 없고 아시아 쪽 개발협력 서적이나 사업을 공부해 본 적도 없어서 더 막막했다. 소통하는 지부장님도 단편적으로 자료를 주기 일쑤였다.


'접을까. 이대로 잠수 탈까.'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쩌랴. 다른 기관들도 이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었기에 나만 못한다고 포기할 일이 아니었다. 현장에선 이미 사업비를 받은 것처럼 MOU를 맺고 기관장들과 협의 중이어서 더더욱 물러설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쏙 빠질 수 없었으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끌고 나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단편적으로 사준 물품들을 잘 쓸 것이라는 그럴듯한 내용들로 채워가야 하는데 현장에 있어 본 것도 아니고, 한국 사무실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배경들만 듣고 그림을 그려나갔다. 


물품을 사준다. 잘 배치했다. 돈 잘 썼다.


이게 뭐지, 뭐지 하면서 쓰다 보니 살이 되게 잘 붙여졌다. 차라리 망할 것 같으면 속 편할 텐데 그럴듯한 모습이 보이니 더 불안했다.

기대했다가 안되면 어쩌나.

너무 뻥을 크게 치는 제안서가 아닌가.


단순 일회성 지급인데 비교적 지속성을 갖고 하길 바라는 갑 기관의 요구에 따라 이러저러한 방어진을 치다 보니 그럴듯해졌다. 불이 나지 않아도 대기할 수 있는 소방수를 구축시킨 것처럼 매우 잘 꾸며놨다.


그렇게 며칠간의 씨름과 야근과 각고의 고생 끝에 제안서가 무사히 제출되었고, 대표님 외 관련자들이 면접을 다녀오고 며칠 후,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승인.

현장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잘할 수 있을까, 불안감 반 안도감 반 수락된 제안서의 수정본을 들고 갑 기관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협의를 하기 위해 만났다. 그들은 친절했으나 병원과 의료체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던 터라 기본적인 부분들만 질문했고, 별 무리 없이 디펜스 하며 추가 부분을 보완해서 제출했다.


그렇게 2주가 넘어서야 협약이 체결되었고, 그렇게 조무래기 개발협력 새내기는 처음으로 통과된 제안서를 작성해봤다. 


그래, 배경이 아무것도 없는 것도 해냈는데 내가 현재 진행 중인 사업 1기가 완료되고 지속 사업 제안서 작성하는 건 이것보다 쉽겠다, 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1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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