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조사관 임기제 공무원 지원 후기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년 8월
중국에서 살다가 설날에 들어와 남편만 직장 때문에 출국시키고, 갑자기 취업한 파견직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아무래도 올해 안에 코로나로 인해 파견이 불가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남편과의 별거 기간이 6개월이 지났고, 일반인이 중국으로 갈 수 있는 모든 비자가 말소된 상태라서 파견지로 출국될 수도 없고, 남편에게 갈 수도 없었다.
방법은 단 하나, 남편이 사표를 내고 모든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선택을 해야 했고, 남편이 사직을 하고 오기로 했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기로 했다.
파견이 됐을 시, 200 언저리의 급여는 우리 둘이 먹고살기에 빠듯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일단 우린 전세 대출 없이 방 한 칸 서울 및 서울 근교에서 마련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 성격상, 친정집에 얹혀 살 정도로 더부살이가 익숙하지 않았다. 양가에 손을 벌리는 것은 더더욱 하기 어려웠다. 계산기를 두들겨 보니 지금 받는 급여만으로는 내 대학원 학비, 전세 대출금 등을 하게 되면 모아놓은 돈들을 모조리 사용하고도 남편이 바로 취업이 되지 않는 한, 마이너스 통장이 될 일만 남았다.
학업을 그만두지 않고, 현재 생활비에서 심각하게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는다면 방법은 내 급여를 올리는 일이었다. 그전부터 결혼하면서부터 남편이 회사를 나오게 되면 한동안 그가 원하는 기간까지 오랫동안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당장 더블 인컴이 되지 않는다면 내 급여를 올리는 것이 해결책 중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급여를 올리겠다는 생각은 현재 받고 있는 급여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높은 급여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간호사로 3교대에 돌아가도 급여는 오를 수 있었고, 임상시험 쪽이나 다른 연구소에 4대 보험 없는 교수님 소속의 연구원을 한대도 지금 보다 더 받을 수 있었다.
돈만 많이 받는 거였으면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하진 않았을 것이며, 진즉에 지금 있는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망할 놈의 자아실현이라는 덕목이 너무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알량한 욕심 때문에 돈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얼마 안 가서 자아실현과 커리어 욕심을 채워질 수 있는 자리들이 나타나자 현재 직업에 대한 충실도를 흔들어 놓았다.
역학조사관
메르스 이후로 전국에 100명대에 가까운 역학조사관을 채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질병관리본부 산하에 둘 수 있는 조사관 수를 늘리는 것이었지, 시군구마다 뽑을 수 있는 인원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 판데믹이 터지고 나서 지방마다 당장 불을 끌 소방수가 필요한데 멀리 청주(질병청), 시/도에서 파견 나온 중앙역학조사관 혹은 민간 역학조사관들이 급파되어 오니 시간이 생명인 감염병의 저지에 차질이 생겼다. 감염병 법안이 통과되고 나서부터 인구 10만 이상인 시군구 지자체에서 자율적으로 인원을 채용하여 둘 수 있었다. 10만 이하인 도시에선 관련 공무원 및 공보의(공중보건의; 군복무 의사)를 역학조사관으로 둘 수 있다고 했다.
역학조사관의 조건은 각 기관이나 지자체 별로 다양하나 대부분 '의료인' 면허증이 있고, 임상 혹은 감염병 관련 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면 된다. 일반 공무원처럼 9급 8급이 아닌 전문가 급수에 따라 가부터 마급까지 있고, 의사/한의사/치과의사는 가급, 간호사/보건학 전공자(석사 이상)는 다급/라급으로 채용하고 있다.
여하튼, 그런 배경으로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현장'에서 일할 수 있으며 감염병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채용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게다가, 급여도 기존에 다니던 NGO 회사보다 후한 편이었다. 임기제 공무원이라 정규직 공무원과 달리 단기간 채용직이라 상여나 기타 수당 등이 기본급여로 포함되어 지급되기 때문에 사회에서 이 정도 경력의 사람들이 받는 급여만큼 지급하게 된다.
한동안 집안의 가장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보수와 계약 기간 만료 후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계약직 노예라면 조금이라도 더 받고 노예를 하자는 생각으로 남편과 상의 후 적극적인 지지로 인해 무수한 고민들을 뒤로하고 지원서를 작성했다.
고민이 많았던 이유는 이제 나이도 애매하게 많아지는데 국제보건으론 해외에 나가지도 않은 10개월이 관련경력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다시 국제보건을 하고 싶어도 10개월짜리 경력을 보곤,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들로 서류에서 거를 것이다. 국제보건이 싫어서 떠난 건 아니라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고민이 컸다.
공무원이든 공기업이든 공정한 채용을 위한 이상한 트랙들을 설치해놔서 아주 골 아픈 지원서 작성을 했다. 공무원 서류접수는 무조건 우편으로 직접 출력한 종이들을 쌍팔년도처럼 우편통 상환(우편으로 보내는 현금의 일종)을 사서 동봉해야 한다.
이 무슨 석기시대 같은 구시대적인 일이란 말인가. 여기서부터 공직 사회의 변하지 않는 올드함을 느꼈다. 겁나 많은 이력서의 칸들과 직무기술서, 심지어 경력증명서도 이전 회사에서 떼어준 대로 가져가면 반려당할 수 있다. 그들이 원하는 항목과 내용들을 필히 확인받아서 다시 작성 부탁한 후 출력해야 한다.
문제는 그 원하는 조건이 수두룩 빽빽하다는 것. 하나라도 안 맞으면 경력 인정 안 될 수 있다고 한다.
젠장
다시 인사처에 연락해서 다시 받고 모든 서류를 모으고 합쳐서 출력하여 등기로 보냈다.
하루 이틀이면 빠진 서류가 있으면 보내라고 연락 오고, 수험표를 이메일로 보내 주거나 문자로 수험번호를 알려준다. 결과 발표 또한 개인정보 공개의 위험이 있어 수험번호만으로 발표한다. 시험장에도 주민등록증과 같이 들고 가면 된다.
펜도 필수.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나의 채점표에 수능 때 작성했던 '이것은 나의 자필로 작성했습니다.' 같은 문구를 수기로 직접 작성한다. 면접장 들어가기 직전에 이러한 내용을 다 하고 나면 차분히 면접을 기다리는데 휴대폰을 걷어간다. 초등학교 이후로 오랜만에 폰 없이 멀뚱 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행동을 했다.
기존에 쭉 뽑아왔던 자리라면 계약이 완료된 전임자가 면접을 볼 것이며 그가 내정자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역학조사관을 시군구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뽑는 것은 공중보건의를 데려오는 것 말고는 없었으니
누가 봐도 처음인 자리고 내정자가 없었다.
면접관은 내외부 위원들이 섞여 총 5인이 앉아있다. 분위기는 역시, 시기가 시기인만큼 생각보다 많은 액수의 연봉이라 생각해도 면접관들은 희생과 봉사 등 힘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너의 포부를 들어보자, 식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그럴듯하게 답한다.
내가 가진 경력과 지금 투입되는 일과의 연관성을 피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 내가 얼마나 공직자로서 뼈와 살을 분리해서 각오를 다질 것인지를 적당히 오그라드는 단어들을 조합해 의연하게 말하고 나면 개인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무례하진 않지만 걱정되는 부분들. 감염의 위험성이 있는 직업군이니 가족 관계, 중간에 이탈하진 않을지 등을 주의 깊게 물어봤다.
나의 강점으로는 환자를 직접 본 임상경력과 연구를 해본 역학에 발을 담가본 사회 초년생에서 조금 지난 나이라는 점. 아이가 없는 유부녀(리스크도 있지만 육아를 안 하니 다행?이라 생각한 듯했음).
그러나 최대 단점은 조각 경력이었다. 가는 곳마다 듣는 조각 경력이라 꺼려진다는 말씀들. 변명도 솔직함도 딱히 할 말이 없다고 남편에게 푸념하니 “그냥 나 때문이라고 해. 사실이잖아. 남편 놈이 결혼하자고 죽자사자 매달려서 때려치우고 가서 이 모양이에요,라고 해. 이젠 그놈이 직장 때려치워서 가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이라고!” 했다.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어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나온 것 같다. 왜냐하면, 뭐라 말해도 팩트는 내 경력이 일 년 머시기고, 타의만으로 그만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곳, 두 곳, 세 곳 등등 한 번에 합격이 되지 않아 계속해서 지원서 넣고, 면접 보는 것이 한 두 달 간의 일상이 되었다. 처음엔 호기롭게 삼 세 번 안에 끝나겠지, 했는데 붙었는데 다른 곳이 더 맘에 들어서 포기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지고 등등을 반복하다가 5번째에서 결론이 났다.
가장 원하던 급에서 지금 사는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지자체 한 군데 합격했다. 지난했던 시간들을 보내면서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외조의 왕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아서 결국 원하는 결과를 받아냈다.
이리하여 올 초부터 가고자 했던 방글라데시 사업장은 가지도 못하고 다시 한국에 정착하게 되면서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또 다른 조각 경력의 한 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