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뉴스입니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금년대비 10.9% 인상된 8,350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계는 인상폭을 상향…
뉴스를 보던 엄마의 한숨이 짙어졌다. 옆에서 함께 화면을 보던 아버지는 한숨을 넘어 성토를 시작했다. 내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좋아진 적이 없었던 경제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올라가는 재료값과 더불어 인건비 부담까지. 살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결국 그 끝에는.
그러니까, 은주 엄마! 우리도 모든 메뉴를 전부 다 1,000원씩 인상해야 한다고! 서울 나가봐, 육개장이 9,000원이야. 9,000원! 근데 우리는 얼마야? 칼국수가 4,000원이잖아. 너무 저렴해서 남는 것도 없잖아, 그렇잖아!
은주 아빠, 정말 속 모르는 소리 좀 그만해.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계산동이라고 몇 번을 말해. 여기 물가도 고려해야지. 그리고 그렇게 한꺼번에 올려서 손님 떨어지면 어떡해?
최근 들어 더 빈번해진 최저임금 소식이 티브이에 나올 때마다 엄마와 아버지는 음식 가격 인상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이어갔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노라면 아버지의 의견도 엄마의 의견도 너무나 다 옳아 나는 이 곳에 제발 손석희 아나운서가 와서 냉정하게 중재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그러나 사실, 엄마도 내심 버티기가 힘들기는 했다. 아버지 말마따나 밀가루값은 점점 오르고 있고, 김밥이나 우동에 들어가는 야채값은 이례적인 가뭄이 오거나 태풍이 분다는 소식만 들려도 천정부지로 솟곤 했으니까. 거기다가 또 인건비까지 오를 건 뭐람. 하지만 무턱대고 아버지 말대로 모든 메뉴를 1,000원씩이나 인상할 수는 없었다.
벌써 가게 맞은편에는 새로운 24시간 감자탕집이 오픈을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특히 60대 이상 노인이 오면 해장국은 무료로 준다는 문구까지 적혀있는 상태였다. 작은 분식집일 뿐이지만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지고, 일은 할수록 스스로의 손에 남는 건 점점 줄어들 뿐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잡념과 함께 답도 없는 고민이 이어지면 행운 분식으로 더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손님들이 참치김밥, 깻잎 김밥, 김치김밥과 같은 각양각색의 김밥을 여러 줄이라도 주문하면 그것에 집중하느라 벌써 최저임금인지 최저 왕비인지 하는 것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곤 했으니까.
그러던 중, 딸랑, 하며 행운분식의 문이 열렸다. 엄마는 재료 준비를 하다 손님이 왔나 고개를 들었고 금세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배가 부른 임산부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온 것이다. 뒤에는 막 주차를 마치고 온 남편도 서있었다.
아이고, 오랜만에 왔네!
사장님, 저 오뎅우동 먹고 싶어서 왔어요. 아니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밤새 이 집 오뎅우동이 생각나서 신랑 졸라 용인에서부터 달려왔어요.
많이 줘야겠네. 아이고, 아들 많이 큰 것 봐.
엄마는 어느새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그 집 큰아들을 유심히 보았다. 바로 옆에 앉은 임산부 손님의 어렸을 적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는 여자 손님을 처음 본 순간을 떠올렸다. 교복을 입은 채로 부모님을 따라 쫄래쫄래 행운 분식에 들어서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왔다. 감회가 참 새로웠다. 엄마는 그 날, 오뎅도 면도 국물도 곱빼기로 주었다. 그게 오뎅우동 하나 먹겠다고 용인에서부터 달려와준 손님에게 고맙다고, 반갑다고 전하는 엄마만의 표현방식이었다.
가족은 식사를 끝내고,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열었다. 메뉴판을 슬쩍 보고 현금을 꺼내는 손님이 앞치마를 두른 엄마를 보고 말을 건넸다.
사장님, 여기는 맛도 가격도 언제나 그대로예요. 세상 다 변해도, 여기는 안 변해요. 여기만 오면 학창 시절 생각이 나요.
엄마는 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라지는 창밖의 손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마치 사진을 들여다보듯 예전의 행운분식을 기억하곤 할 거다. 그리고 우동냄새에서 피어오르는 추억을 맡으러 발걸음을 내딛곤 하겠지. 하지만 팍팍해져 버릴 대로 팍팍해진 세상에서 숫자와 그릇 크기만 달라져도 사람들은 이곳도 역시나 변했구나,라고 내심 아쉬움을 느낄 테다. 엄마는 잊어버렸던 뉴스를 다시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손님뿐일까, 행운분식에는 공사판에서 일하는 인부 아저씨들도 참 많이 오곤 한다. 엄마는 공사판 아저씨들이 오면 내심 좋아하고는 하는데, 그 이유인즉슨 공사기간 동안 매일 출근도장을 찍어 매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비록 3,500원짜리 된장찌개지만 메뉴를 늘 통일해서 주문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저들끼리 신이 나는지 유쾌하기까지 해 옆에 있던 엄마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 엄마는 천장에서 숨겨놓은 프렌치카페 커피믹스를 꺼내 이 무더위에 공사하느라 수고하셨노라고 서비스 커피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은 믹스커피 한잔이 어느 날은 참 고마운 화답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인부 아저씨들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왔다. 열 평도 안 되는 가게에 있는 다섯 테이블이 전부 다 차고 포장 손님까지 줄을 서있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서 빈그릇을 치워야 하고, 서빙도 해야 하고 요리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진땀을 뺐다.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요리가 나오려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았는데 엄마는 그럴 때마다 칼로 김밥을 써는 동시에 10분이요, 손님! 금방 해요!라고 대답하기 바빴다. 그런데 그때,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우리가 먹은 그릇은 우리가 치웁시다!
어느 공사장 인부 아저씨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엄마는 이게 무슨 일이지, 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쭈욱 뺐는데 놀랍게도 아저씨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테이블을 싹 다 치우고 있었다. 그뿐인가, 각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엄마가 내갈 음식을 서빙까지 해주고 포장 손님이 들어와 몇 분이나 기다려야 하냐고 물어보면.
아가씨! 10분이요, 10분! 그리고 아가씨는 5번 손님이야. 앞에 4명 밀렸어!
라고 답해주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엄마는 이때, 이 아저씨를 스카우트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공의 크기와는 달리 아저씨들의 퇴장은 쿨했다. 그저 왼손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고 오른손만 들며 뒷모습을 보인 채 나갔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 아저씨들이 바바리코트에 선글라스만 썼다면 영웅본색의 주윤발 같았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엄마 또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공사장 인부 손님들의 인정은 그 누구보다도 부자같이 보였으니. 내일 오시면 된장찌개에 같이 나갈 특별 반찬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녀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모든 업이 그렇듯, 음식장사도 이렇게 순탄한 상황만 직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가게에서 돌아온 엄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녁 한 열 시쯤 되었나, 손님도 없고 의자에 앉아 가만히 티브이를 보는데 어떤 키 요매난 아이가 들어오더라. 응? 남자 애지, 남자애야. 키가 딱 요만해. 딱 봐도 중학생쯤이나 되었나, 아주 깡마른 게 너 어렸을 적 같았거든. 히마리 하나 없이 들어와서는 라면 하나 주세요 라고 말하는 거야. 끓여서 내주니까 허겁지겁 먹더라고 나는 뭐 그동안 재료 손질하고 짜장이 얼마나 남았는지나 보고 그랬지.
그런데 조금 낌새가 이상한 거야. 재료 손질하면서 슬쩍슬쩍 쳐다보니까 애가 다 먹고도 핸드폰만 보고, 가게 이곳저곳 쳐다보면서 눈치만 봐. 그래서 좀 느낌이 싸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출입구로 아주 전력을 다해서 도망을 가는 거야. 아이고. 놀래기도 했지만서도 뭐 그런 일 한두 번 겪어보는 것도 아니잖아. 장사 24년 하면서 내가 별일을 다 겪었지. 이 조그만 분식집에서 먹고 도망가는 사람들 한두 명이겠어, 더한 사람들도 봤지. 그러고 나서 출입문에 서 그 녀석이 간 방향을 보고 있는데 저어어 멀리 돌아보지도 않고 엄청 빨리 뛰어가더라고. 잡으러 갔냐고? 그걸 어떻게 잡아, 잡을 수가 없지. 맘먹고 도망간 사람을 내가 어떻게 잡아. 그냥 출입문에 서서 그 길만 봤지.
에휴, 근데 어린 것이 불쌍해.
먹으려면 밥을 먹고 도망가지.
그 녀석 겨우 라면이나 먹고 돌아가는 게 안쓰러워서.
물가도 오르고, 경쟁도 치열하고…, 누군가는 이런 팍팍해진 사회에서 손님들의 지갑을 열게 하려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멋진 인테리어 그리고 종업원의 매뉴얼화된 친절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계산동 행운분식에서는 그런 비스무리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어느 한 사람의 과거 한가운데 있는 추억의 맛을 언제든지 묵묵히 있는 그대로 내어줄 뿐이고, 사람 냄새나는 인정이 오고 갈 뿐이며, 이해타산으로 돌아가는 가게가 아닌 어떤 이를 진정으로 안타까워할 줄 아는 가게일 뿐이다. 그게 우리 엄마가 지키는 철학이고, 행운분식이 굴러가는 질서다.
올해도 역시나 물가가 올랐다는 뉴스가 들렸다. 아버지는 또 엄마에게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는 정말 현실 앞에서 엄마도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결국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몇 개의 메뉴에 한해서 아버지가 말한 1,000원은 아니더라도 500원 정도를 올렸다.
그러면서도 변화에 대해 매우 불안해했고, 손님들에게는 미안해했고,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 역시나 가게로 조금 더 일찍 출근했고, 24년 전과 다름없이 주문을 받고, 냉장고 속에서 재료를 꺼내고, 가스불을 켜며 단골과 낯선 이들을 맞이할 요리를 준비한다.
<작가의 말>
저희 행운분식은 모든 메뉴에 '인정'이 필수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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