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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와이 Jun 04. 2021

과해서 적당해

- Prologue



거리에서 집어 든 싸구려 선글라스와 커다란 펜던트의 레플리카 목걸이, 만원에 네 장 짜리 촌티 나는 골지 나시를 색깔 별로 구입해서 무작정 서유럽으로 혼자 떠난 건 23살. 이제 막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무렵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여행 경비 탓에 배낭 속엔 젊은 패기만 담았다. 의사소통에 대한 걱정이나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내가 유럽에 간다고..? 에펠탑을 본다고?? 콜로세움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거대한 설레임을 뚫고 나올 수 없었다.


인생의 주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낯선 거리, 낯선 풍경, 낯선 문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낯선 사람들. 그 속에 섞이는 동안 잊혀지는 현실의 걱정과 불안들. 여행은 호기심 가득한 나를 현실과 전혀 다른 세상에 데려다주었고, 한 시간 뒤에, 또 하루 뒤엔 어떤 일이 생길지 매 순간이 설레이고 신기했다. 그만큼 여행 후의 후유증은 한참 동안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만들고, 그렇게 한 번의 여행은 또 다음 여행으로 이어졌다.


여행이 좋았다. 여행 중 마주치는 수많은 순간들이 좋았다. 내가 느낀 감정들과 생각들을 잊지 않기 위해 남기던 짧은 글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의 행복, 즐거움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온라인에 공개되기 시작하고, 글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느껴지는 ‘여행’이란 주제는 곧 내게 사진을 공부하게 만들었다.


거듭된 여행은 오히려 갈증을 키우며 점점 더 멀고 험한 곳으로,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찾게 되었다. 또래들 보다 조금 더 나은 벌이와 조금 더 안정적인 직장은 이러한 것들을 조금 더 수월하게 해주는 감사한 수단임과 동시에, 그렇기에 쉽게 포기하고 떠나버릴 수 없는 족쇄였다. 그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 또한 내 손에 쥐어져 있기에 여행이 계속될수록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이 반복됐다.







난 늘 진지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나를 유쾌하고 조금은 가벼운 그저 재미있는 달변가로 알고 있을 수 있지만 나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알게 된다. 난 늘 진지하다. 작은 것들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남들보다 풍부한 감성은 내 감정 기복을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며 늘 많은 생각과 고민과 고찰을 머릿속 가득 채운다.


누군가는 내게 생각이 너무 많다고도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삶의 모습이 지금의 그것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확신은 누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 수많은 순간의 '내가' 만들어 낸 결과로써의 또 다른 순간이다. 내게 변화가 필요한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의 나'이기에 변화가 필요하단 논리로 접근을 한다면 난 지칠 뿐 동의할 수가 없다.


'생활의 지혜'는 thanks,

어쭙잖은 '삶의 지혜'는 no thanks.

내가 낯 간지러운 자기 계발서를 못 읽는 이유이다.




-


위로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답을 가진 채 내 앞에 선다. 가끔은 ‘괜찮아.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말을 해야할 때가 있다. 나 스스로는 끊임없이 도전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지만, 그 무게가 삶을 짓눌러 숨통을 조인다면 억지를 부릴 일은 아니다. 좀 쉬어가도 좋다. 아니 그냥 그대로도 좋다. 그것이 그들의 적당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것이 그들이 내게 원하는 대답이다.


 또한 상당히 많은 것들을 버리고 산다. 하지만  갖겠다 하는 것을 위해서는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모든 힘을 다한다. 결과엔  자신이 있지만, 아직은 전문가이기 보단 멀티 플레이어인 편이 좋고 그건 어쩌면 지금의  방황을 반증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를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가 없이,

결국 그저 받아들일 일이다.

누군가에게 과함도 아직 내겐 적당함일 뿐이라는 걸.








- 폴린와이 travel photo essay,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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