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가 만나는 시간
나는 내가 조용할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다. 대부분 내게 “너는 활달하고 적극적이야”라고 말했다.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고, 질문을 던지고, 웃곤 했으니까. 그런 모습만이 내 진짜 모습인 줄 알았다.
누군가 눈앞에 있고,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살이 스칠 때, 내 존재를 확인했다. 혼자 있는 게 두려웠다. 내 존재가 사라질 것 같았다. 혼자 집에 있게 되면 그 적막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다. 내 불안을 누군가를 통해서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도 새로운 걱정과 불안이 또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 때문에 힘들다고.
내 삶을 위한 선택도 누군가에 의지했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어색했고 옳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2년제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4년제를 가라고 해서 4년제를 갔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1년이 넘도록 취업을 하지 못했다. 서류에서 좌절과 면접에서 좌절이 줄줄이 이어지는 나날들이었다. 어찌어찌 나중에 들어가게 된 회사도 부모님이 골라준 회사였다. 그런데 통장에 쌓이는 돈만큼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든든하기보다는 허전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 때문에 힘들다고.
이랬던 내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더는 퇴근 시간과 주말만 바라보며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이 아닌 미래로 향해 있는 내 마음을 이곳에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매일 이렇게 손에 힘을 꽉 쥐며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일은 원래 재미없고 힘든 것이라고 했다. 친구들도 동료들도 다 그렇게 지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한 저녁 시간과 노후를 꿈꾼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은 내게 답이 되지 않았다. 왜. 왜. 왜. 그래야만 하는 거지. 왜 행복도 미래를 위해 저금해 둬야 하는 거지. 왜 지금은 행복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거지. 왜 오늘처럼 내일도 건강하고 젊을 것으로 생각하는 거지. 오늘 밤에 눈을 감고 내일 영영 못 뜰지도 모르는데.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갔다. “공무원 시험공부해도 될까요?” 공무원이 안정되고 편안한 직장이라고 하니까. (실제로 공무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회적으로 인정해주는 직업이니까. 여성 출산 휴가나 공무원 연금을 받을 수 있으니까.
“공무원 시험 준비해요. 윤 씨가 하고 싶은 다 하면서 지내도 돼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지내도 된다는 답을 들었지만,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 공무원이 되어서, 아니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몇 년 동안 의자에 다리에 묶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종이를 바라보며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남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 실망, 실패하든 다 내 탓이길 바랐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고 싶었다.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 두려웠던 적막 안에 들어앉았다. 그리고 나와 마주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았다. 대신에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귓가에서 작게 속삭이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회적으로 명예를 쌓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 꼭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남들이 알아주는 곳에 소속되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곳이 나를 평생 책임져주는 것인가? 소속이 없다면? 돈이 목적이 되어 일을 해야 할까? 일하는 순간에 재미있을 수는 없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취감과 돈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지? 물고기가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새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내가 유유히 걸어 나갈 수 있는 곳은 어딘 거지? 일과 삶을 왜 분리해야 하는 거지? 일과 삶이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내가 가진 능력은 무엇이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이지? 나는 누구이지? 나는 왜 태어났지?
모든 답을 명료하고 확실하게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들리는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게 되었다. 누군가 남긴 발자국이 하나 없는 울퉁불퉁한 흙과 돌이 쌓인 길이었다. 내 힘으로 길을 찾고 만들어 나가야 했다.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지만, 내 발 밑은 어두웠고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 내 감정을 인정했다. 그럴 수 있다고.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그리고 물었다. 다른 목소리를 따라갈 때 행복했냐고 물었다. 확실한 대답이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지금은 고요함이 만든 공간에서는 나는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다. 그 안에서 나와 마주 앉는다. 마음이 하는 말이 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들린다. 내 몸과 마음이 더욱 단단하게 연결되었음을 느낀다. 때로는 마음이 몸을 못 따라오기도 하고, 앞서기도 하지만 금방 다시 같이 걸을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잠시 뒤 돌아보면 뿌듯하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적막 안에서 나는 풍요롭다.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