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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Feb 07. 2024

겨울에는 봄을 상상할 수 없다.


해가 내리쬐다가, 눈이 오다가, 흐리고 다시 맑아지기를 10분 간격으로 반복하는 오후였다. 

그 장엄한 풍경을 시시각각 바라볼 수 있는 창문 뒤에 살고 있다니. 내가 정의했던 많은 성공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행복을 이루는 요소들,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광 앞에서 무용해지지 않나. 


평일 오후 2시. 하릴없어 창 밖을 바라보는 여유가 주어진 적이 있던가. 신혼여행 정도가 아니었을까. 

선물 같은 오늘은, 물만 삼켜도 토해내는 나를 보다 못한 분들이 그럴 거면 집에 가라고 등을 떠민 덕분이다. 그러니까 컨디션이 안 좋은 덕분에, 

그리고 내가 없어도 하루 정도는 내 자리를 충분히 메꾸어 주는 팀 덕분에. 

11월 오후, 햇살과 눈송이를 동시에 맞는 푸른 잎사귀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1년 전 오늘만해도 천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모험이었다. 아주 얇은 선 하나조차 그려지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는데. 이 동네가 피부처럼 편안한, 생활로 자리잡는구나. 


얼마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가장 편해진 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마트가 있다는 점이다. 불쑥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 배달의 민족을 만지작거리지 않아도 된다. 운동화 끈을 묶고 집 밖으로 나선다. 눈이 내리는 따사로운 오후를 걸어 떡볶이 재료를 사오는 데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ㄷ’자 모양으로 넓어진 아일랜드 위에 도마를 올려놓고 양파를 썰면서 변화무쌍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고보니 전에는 2층 대로변에 창이 있어 항상 블라인드로 가려 두어야 했다. 나는 피부에 엽록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해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었다. 이제는 큼직한 창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으니 집보다 좋은 곳이 없다. 


떡볶이를 먹고 얼마 전 도착한 소파 위에 벌렁 눕는다. 고요하고 따뜻한 거실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다. 해질녘 시간을 타이머로 설정해두고 노을 명소를 향해 달리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교회가 있고, 바로 옆동에는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가 생겼다. 

저녁을 함께 먹을 남편이 있고, 손을 놀리지 않게 해줄 일감이 있다. 

웃으며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다.


시계를 조금 거꾸로 돌려본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걸어가는 아침이 있다. 일찌감치 떨어진 일거리에 모두를 일찍 퇴근시키고 가만히 앉은 한낮이 있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동네친구를 바라던 밤이 있다.

손을 잡고 온 슬픔은 옹기종기 모여 절망과, 외로움과, 불안으로 몸뚱이를 키운다. 그 진득한 비웃음에 틈을 내주면 하루가 시퍼렇게 질려버린다. 안타까운 날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노력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사건 사고도 막을 수 없다.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내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 어깨에 덕지덕지 묻은 우울을 털어내고 걸으면 발목을 잡던 서러움은 잡아먹을 다른 사람을 향해 몰려간다. 그렇게 걷다 보면 노을을 볼 수 있는 가까운 창문도 있고, 1,120개의 주문도 있다. 절망에 먹혀 있을 때는 꿈도 꿀 수 없던 것들이 모퉁이마다 기다리고 있다. 


비애는 환희를 빛내는 파트너이지만. 찬바람이 불면 겨울의 낭만에 젖으면 된다. 애써 그 차디찬 감각에 몸과 마음을 뺏기기엔 생이 너무 짧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도 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아무리 매서운 눈보라도 1년 내내 몰아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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