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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Oct 03. 2022

착하다는 말은 칭찬인가

착하다는 말이 한동안 언짢았다.



  오랜만에 G가 한국 왔다고 해서 모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눈물 쓰나미를 일으켰던, 나의 연애사를 직관했던 둘은 조언한다.

넌 착한 애들 좀 만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한다.


이봐요~ 언니가 저번에 그랬잖아요.
착하다는 건, 특색 없는 애들한테나
 붙는 수식어라면서요.

이어서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이 시대에서 ‘착하다’는  말이 갖는
속성을 모르겠어요.
특히, 이성을 볼 때
매력이 없다는 말 아니에요???



[ 착하다 = 매력 없다 ]


 소개팅 나갔다가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착해~”라고 평가했으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할만한 다른 형용사를 찾아보았다. 이를테면 따뜻하다. 자상하다.가 좋겠다. 이렇듯이 요즘에는 [착하다]는 말의 의미가 확 와닿지가 않는다. 애매모호하달까. 무색무취하달까.


 그런데, 어르신들 생각은 다른가보다. 착하다는 말이 곧 [기특하다]처럼 쓰인다. 가령, 자식이 일찍 독립하여 부모의 걱정을 덜면, [착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엄마~ 착하다. 는 좋은 말이야?

갑자기 착하지 못한 딸은 착해지고 싶었다. 동시에, 착하다는 말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젊은 세대 일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다. ‘(더 심각한 건)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마디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 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지나온 길에 “위선 떨지 마”라는 말을 한 번 듣고 충격을 먹은 적이 있었다. 반면, 나는 그 친구가 너무 영리해 보여서 무서웠다. 대체로 그런 친구는 생존력이 강하고, 셈이 빠르고, 직관력이 뛰어나다. 는 장점을 갖지만, 옆에 있으면 내가 도구가 되어 수단화되지 않을까 께름칙하다.


 내가 정말 위선적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착하다’는 말이 다소 어색하고, 힘겹게 들렸다. 나도 그저 상처를 잘 받는 개복치와 같은 성향을 가졌다. 이렇듯 어떤 형용사는 시대에 따라서 달리 소비되고, 거리감이 생겨버린다. 허물고 다시 쌓이는 관계처럼, 착하다는 말이 주는 신뢰성도 다시 쌓아봐야겠다.





Martin Buber

그는 인간을 일종의 '사이(between)' 속에서 살아가는, 즉 관계의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부버의 명작 『나와 너』는 현실 세계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인간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유명한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세계는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이 된다. 하나는 ‘나와 너’로 관계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때 마주한 두 사람은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이좋게 소통할 수 있다. 이는 마음을 열고 진실로 서로를 대할 때 이루어지는 관계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자신을 안아주는 어머니와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한다.

  또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으로 관계하는 태도다. 여기서 ‘그것’이란 물건이나 일, 또는 상황을 뜻한다. 상대가 사람인데도 물건인 양 취급하는 것이다. 상대의 조건이나 속성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태도다. 상대를 단지 장사 도구와 같은 존재로 간주할 때 ‘나와 그것’이라는 냉담한 관계가 성립된다. ‘나와 그것’의 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조작’, ‘처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와 같이 자본이 우선되는 사회에서는 이익 추구를 내세우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우리는 본연의 인간성을 쉽게 잃어가고, 돈과 도구로 좌지우지하는 힘에 의해 세상은 사랑 없는 어둡고 좁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  ‘나와 너’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하며 보잘것없는 관계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주변과 이렇듯 깊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면, 세상 어디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느긋하고 평온하게 머물 장소를 찾지 못한다.  장소와 환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아무리 수준 높은 교양과 고고한 학력을 갖추고 유능한 재능과 풍족한 자산이 있다 해도 이러한 조건들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는 데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오로지 그때 자신이 취하는 태도와 마음뿐이다.  또한 ‘나와 너’라는 밀접한 관계에서 수준이나 입장에 위아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같은 강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그 관계에서 나는 나인 동시에 너이며, 너는 너인 동시에 나다.      

상대가 ‘물건’으로 전락할 때   
 만약 우리가 ‘나와 너’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 정형화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사람 간의 교류를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세속적인 방법론으로 설명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인간 관계술’ 같은 개념이 나올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인 자연과의 교류를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살랑살랑 풀꽃의 소리를 듣는 경험도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와 너’의 관계로서 신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며 평온을 찾던 사람이, 신의 특성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면 두 번 다시 ‘나와 너’의 상대로서의 신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_니체와 함께 산책을 :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여행하는 법 | 시라토리 하루히코 저/김윤경 역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dn’t in any of us…

…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If there's any kind of magic in the world...

...it must be in the attempt of understanding someone, sharing something.  _beforesunrise_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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