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여행에 '아름답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서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후 사진을 의미있게 되새겨 본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여행을 기억하는 방식이 사진이 아님을 확인할 뿐이었다. 내가 여행을 기억하는 도구는 글이 아닐까? 대만 여행을 다녀온 후 인생 처음 글로써 여행을 기록하며 그 생각에 무게를 더 했다.
“우리 대만에 갈까?”
몇 달 전 가장 친한 친구 은지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가자.”
이 전에 함께 했던 여러 번의 해외여행처럼 5년 만에 가는 우리의 여행은 쉽게 결정되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여행 취향을 다 아는 사이. 약속한 것은 결국 다 지키는 사이. 은지와 나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는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4박 5일간의 대만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했다. 이번에는 타이베이로 입국하여 가오슝으로 출국하는 여정이었다. 우리 둘 다 타이베이는 이 전에 여행한 경험이 있었고 가오슝은 이번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8일 아침 나는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우리는 김포공항에 비행기 이륙 시간보다 3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둘 다 시간에 관해서는 여유로운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오랜만에 깨닫고 웃었다.
이번 여행은 오랜만에 해외로 나가는 것이기에 여행을 준비했던 옛날 기억을 더듬어도 자세한 절차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왕좌왕 많이 헤매며 유독 ‘혹시 내가 터무니없이 깜빡하고 있는 것이 없나’하는 걱정 속에서 준비했다. 여행 전날 은지와 통화하며 다시 그 걱정을 이야기했을 때 은지의 한마디가 날 안심시켰다.
여권만 있으면 돼.
여행 가방에 넣어둔 핫팩이 다른 물체로 오인을 받았는지 잠시 여행 가방을 직접 열어 확인하기 위해 밀실에 다녀온 것 말고는 별다른 일 없이 출국 수속을 끝마쳤다. 출국장에 들어서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화려한 면세점의 불빛이 반가웠다. 와! 오랜만이다! 다 잊은 듯했지만 분명 해외여행을 갈 때 느끼는 특별함이 있었고 내가 반짝반짝하는 이 분위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게이트에서 비행시간만 기다리면 되는 순간이 되었을 때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절로 신이 났다. 홀가분해진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티웨이항공에 탑승할 시간이 다 되었다. 비행기에서 기내식 먹는 것을 즐기는 우리는 미리 주문해둔 기내식을 받았다.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쇼핑이나 관광보다 어떤 것을 먹을지에 더 많은 관심이 갔는데 기내식으로 맛있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비행기는 2시간 반 정도 날아 마치 주변 도로에라도 내려앉을 듯 대만 도심 한가운데서 착륙했다. 송산 공항에 도착하니 5년 전에 어머니와 대만 자유여행을 했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짐을 찾고 여행지원금을 추첨하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발급받아온 QR코드로 여행지원금 추첨에 응모했다. 여행지원금 당첨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항상 경품 운이 없었기에 당첨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당첨! 무려 5,000NTD로 한화 2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돈도 돈이었지만 대만이 나를 반겨주는 느낌에 정말 행복했다. 호텔로 가기 위해 익숙한 듯 이지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탔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인 ‘1914 창의문화지구’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배가 고파 눈에 보이는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우연히 들어간 그 가게에서 5년 전과 달라진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영어로 말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피자를 주문하기 위해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음료를 시키는 그 과정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고, 내 영어가 문법에 맞지 않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과거에 영어로 말할 때 자신감이 없고 상대방의 영어가 길어지면 포기하곤 했던 모습에서 확 바뀌어 있었다. 실은 해외여행 공백기 동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영어를 쓸 일이 없어 최근엔 영어 공부에 대한 의욕이 없었다. 그렇게 영어를 위해 내가 했던 노력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모습을 보니 내 노력이 알게 모르게 삶에 스며든 것 같다.
사진제목 : 멍멍아 야옹해봐
‘1914 창의문화지구’는 원래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었으나 양조장이 문을 닫으면서 방치되어 있던 공장 부지를 그대로 재활용하여 복합문화창작공간, 예술 단지로 만든 공간이다. 초저녁의 푸른 잔디와 큰 나무를 보니 시야가 시원하게 탁 트였다. 몇 개의 전시를 구경하고 벽에 너무나 익숙한 ‘화양연화’와 ‘해피투게더’ 포스터가 걸려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마침 공원을 보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비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과 반려동물들이 자유롭게 산책하는 모습을 내다보았다. 여행을 떠나 어딘가 도착했음을 실감하고 그런데도 내가 전혀 이방인 같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은지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느 나라로 여행 왔어도 지금보다 행복했을 거 같지 않아.”
밤에는 시먼에서 수현을 만나는 약속이 있었다. 수현은 타이베이에서 살고 있고 우리는 그날 오프라인에서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은지와 헤어져 지하철을 타러 갔다. 수현을 만나기 전에 꽃을 선물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약속 장소 주변에서 꽃집을 검색했다. 한 꽃집을 찾아 들어갔는데 벽에 한가득 조화만 전시되어 있었다. 가게에서 나오려는 찰나 꽃집 냉장고 안에 장미꽃이 보였다. 모든 장미꽃이 생기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 대만의 날씨 때문일까 궁금했지만 꽃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약속 장소 근처에서 수현을 기다리면서 혼란스러운 긴장감이 갑자기 훅 올라왔다. 그 이유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타이베이 어두운 골목에서 혼자 있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어딘지 신비롭게 느껴지는 수현을 만난다는 것 자체로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긴장감은 수현을 만나자마자 사라졌다. 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안부를 나눈 후 나는 ‘저 요즘 연애하고 싶은 사람 생겼어요.’라고 가장 따끈따끈한 근황을 수현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고 수현은 그 사람의 이름을 물었는데 두고두고 나는 그것이 참 수현이 답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까지 나는 이곳이 외국이고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술을 마셨다. 어느 거리를 걷거나 새로운 것을 보는 것보다, 시먼 거리의 술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실컷 떠들어 보는 것이 평소 내가 바라던 여행의 모습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12시가 넘어서 여행 첫날이 다 지나갔다.
그날 새벽, 수현의 말 중 잔상에 남는 단어로부터 이 여행의 제목을 ‘아름답다’로 지었다.
“일리, ‘아름답다’의 뜻을 알아요? ‘아름답다’는 말이 ‘나답다’로부터 왔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