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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Dec 31. 2023

두 개의 사랑

에세이

사랑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사랑, 타인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랑.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사랑은 아이의 사랑이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우렁차게 울어댄다.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애쓴다. 인정받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이다.


아이는 커가면서 여러 대상에게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포유류의 숙명인 사랑의 알림은 현대 인간 사회에서 보다 내밀하면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학교에서 직장 그리고 웹으로 옮겨 다니며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최근에는 웹의 영향력이 상당히 커졌다. 누구든 다른 삶의 일상에 침투해 '알림'을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자의 이해가 필요하다. 일정 수준의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외부 존재자의 이해를 뒤집어 내부에 존재자를 두는 것으로 대체했다. 내 존재의 알림을 내가 알아채는 것이다.


명상의 '알아차림'은 해당 행위의 반복이다. 그러니 명상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목의 도구로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명상은 보상이 적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 멀다. 존재자가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기도 한다.


잃어버린 반쪽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왜 우리는 반쪽을 갈구하는가? 내 존재의 알림을 들어줄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이 족하기 때문이다. 나의 우렁찬 울음을 들어줄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삶이 정도껏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각별하다. 


아이의 첫울음을 들어준 어머니가 후에 어떤 식으로 아이를 보살폈든 간에 아이에게 '모'의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인간은 '모'의 자리를 비워두고 대체할 것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모'의 자리는 무엇이든 들어설 수 있다. 인간이 아니어도 된다. 현대 인간은 그 자리에 더 많은 것들을 끼어넣을 수 있게 됐다. 숱하다. '덕질'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 들어간다. 그러나 맞지 않는 퍼즐을 억지로 욱여넣는 것과 같다. 사실 그 자리에 딱 맞는 퍼즐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토록 원하는 어머니조차 그 자리에 애초에 맞지 않는 사람이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배제됐던 아버지가 등장한다. 질서와 규율을 의미하는 아버지는 알림을 통제한다. 또한 애초에 너의 욕망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덕질 세계에도 규칙이 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나의 상상 속에서 대상은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질서와 규율이 통용되는 세계에서는 자칫 대상을 잃고 만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질서 내에 살아가야 한다.


부모는 두 개의 역할을 번갈아가며 수행한다. 존재자의 알림을 책임지고 들어주며 사랑으로 보답한다. 그렇다고 역할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부모도 아이에게 알림을 보내고 아이가 부모의 존재를 알아채기도 한다. 이 역할은 특히 아이가 성인이 되고 부모가 노쇠하면서 크게 역전된다.


알아차림의 역할이 부모에게만 있는 것은 너무 가혹하므로 인간은 신을 상정한다. 강인하고 지혜로운 신은 존재자의 알림을 알아채고 그에 걸맞은 상벌을 정한다. 크리스마스 산타 클로스도 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부모의 역할을 덜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신이다.


신이 인간의 존재를 알아주는 절대적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해당 영역은 인간에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사랑은 비교적 쉽다. 타인의 존재를 알아주는 사랑은 보다 무거운 책임과 노력이 수반된다.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잘하는 인간을 선호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되지 못한다. 아마 다들 그 일이 어려운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역으로 존재를 알리는 것이 어렵고 존재를 알아주는 것이 쉬웠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거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알림과 알아차림은 수직적으로 이동하지만, 연인과 부부 관계에서 해당 관계는 보다 수평적이다. 알림과 알아챔이 동시 순환할 때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누군가가 하나의 역할만 맡는다면 시소의 한쪽만 바닥에 닿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새가 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은 구 씨에게 '추앙'하라 명령한다. 내가 너의 알림을 들을 테니, 당신도 나의 알림을 들어달라. 미정과 구 씨는 드라마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설정으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커플이다. 아마 드라마 속의 인간 군상과 해당 세계관의 우주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대표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한 알림으로 서로를 알아채고 구원에 이르러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이다.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와 같이 존재를 알리는 의무가 있다. 또한 부모가 되어 존재자를 알아챌 의무도 함께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라도 좋다. 알림을 보내고 알아차리는 것을 해보자. 우리가 서로 사랑의 '알림 설정'을 해둘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미정이 그랬듯 보다 생동감 있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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