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훈 Mar 06. 202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로 만드는 에세이

사랑은 늘 불만이 많다. 그중에 가장 어이없는 불만은 운명과 선택 그 어떤 것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태도다.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졌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이내 곧 ‘내가 선택한 사람이야’라고 외쳐 버린다. ‘내 팔자야’라고 말하는 엄마는 동시에 ‘내가 그때 그 짓만 안 했어도 ‘라고 말한다. 그냥 사람이 불만이 많은 것일까? 그럼에도 내가 사랑을 불만투성이 문제아로 삼는 건 사랑이 나의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계적인가? 아니면 정신적(영적)인가? 이분법적 시선으로 사랑을 분해하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인가?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마법은 한 줌 모래가 된 듯하다. 로맨틱을 요청하면서도 욕망을 더 선호하는 세계에서는 청춘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이게 한 세대의 잘못이라고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분명 청춘이 부러워서 시기하는 것일 게다. 청춘이 사랑하지 않는 건 전 세대의 잘못이다. 과한 해석일까? 우리가 조망했던 미래이자 과거의 인간들(모든 부모들)의 가능성의 길에서 젊음은 탈락과 공허, 베이글의 달콤함만 맛봤다.


 초라한 인생과 그리고 켜켜이 쌓인 죄의식들 -사랑하는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게 되는 죄의식이 있다. 시간에 예속되어 발목이 붙잡힌 햄릿처럼 할 일을 지연하고 또 지연하며 사랑을 모독하고 결국엔 지옥으로 몰아내는-이 사랑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사랑의 이데아. 끊임없이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다정한 말과 노력의 끈을 놓게 만든다. 당신을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모든 건 무효하다.라고 말한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미안해라는 말은 청자에게 고통이 된다. 우리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고통스럽고 무너지고 만다. ’ 미안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실 그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미안함’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곳에 모든 것이 항상' 있길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 순수한 마음은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희미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다. 이 마음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잊었다고 생각할 때쯤 아니면 정반대로 세상의 모든 문제가 나를 향해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모든 것들을 버리고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세계라는 아비의 냉정한 규율과 도덕 사이에서 우리는 도망쳐 어머니의 아늑한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왜곡되어 자살로 번진다.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아버지의 세계, 규율과 법의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성생식의 자녀이기 때문에 부모 어느 한쪽과의 관계를 취사선택할 수 없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우리의 본능은 아버지의 규율과 법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 이것은 아버지로서는 어머니를 지키고자 하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녀이기에 '그곳에 모든 것이 항상' 있길 바라는 마음을 내버릴 수가 없다. 우리의 부모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자소서의 클리셰 중에 클리셰인 성장과정을 왜 우리는 지겨워하는 걸까? 나는 재밌게도 당신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부모를 만났고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는지 어떤 분위기의 가정을 겪었는지 궁금하다. 그게 화목하든 하지 않든 부모가 이별을 했든 사별을 했든 말이다. 행복과 평범이 공존하기만 하겠는가? 트라우마와 공포로 가득한 곳도 분명 있을 것이다.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트라우마는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모든 선택지 중에 내가 선택하지 못했던 선택지는 바로 '부모'이다. 부모는 서로를 선택했지만 자녀는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났고 어떤 사건들을 만났고 어떤 가정에서 자라게 됐고 나는 이곳의 무언가가 되었다. 나를 이루는 80% (내 생각에 99%에 가깝지만)는 부모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걸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래서 치욕스럽고 광분하고 파괴적이고 허무해지고 냉소적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내고 나니. 살아낸 것이 살아내지 않은 것보다 낫더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삶과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악랄하고 나의 등 뒤에서 칼을 찌를 수 있다. 충분히 그렇다. 그런데 거기서 낙관하지 않고서야 무엇이 나아진다는 말인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두 사람에겐 트라우마와 고통, 낯선 환경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는 낙관적인 희망과 선택지들이 주변에 즐비했을 것이다. 웃을 수 있었을 것이고 힘들어도 함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는 떠나간 자녀를 보며 스스로를 잃은 기분이 들었겠지만 자녀들은 애초에 부모를 소유한 적이 없기에 스스로를 잃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자궁은 자식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안식처가 되어준다. 안식처는 언제나 떠나야만 하기에 안식처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곤란한 가족 관계를 겪는다. 부모와 자녀의 미묘한 관계는 발칙한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이야기로 표현되었다. 이 미묘한 관계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그 우스운 말싸움과 공허한 대화 사이에 담긴 사랑이라는 언어를 놓지 못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어찌나 그렇게나 어려운 건지.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로도 어찌나 그렇게 어려운 관계인 건지. 자꾸만 애석하고 애달픈 마음이 스마트폰에 띄워진 엄마란 글자 위에 얇게 둥둥 떠다닌다.


매거진의 이전글 트루먼과 싯다르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