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강아지와 함께 자랐다. 가족 사항을 적는 가정통신문에 키우던 강아지의 이름까지 적어냈던 적도 있었을 정도니 정말 말 그대로 함께 자랐다.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고 동그란 눈을 들여다보는 게 좋았다. 띵동! 소리를 내며 반질반질한 코끝을 만지고 발바닥을 들어 콤콤한 냄새를 맡는 것도 좋았다. 달리기를 하고 함께 바닥을 뒹굴고 지저분한 흙장난을 할 때면 친구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혼자 뿌듯하기도 했었다. 밖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고 같이 나가 놀고 같이 잠도 자는 그 따뜻한 존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렇게 오래 키운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땐 그 마음을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슬펐다. 인생의 반을 함께 보낸 나의 오랜 친구인데 죽음은 어떻게 이 긴 시간을 단숨에 가름해버리고 마는 걸까. 잃는 것과 잊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때였다.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때부터 이어졌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아픈 기억은 차츰 흐려졌지만 반대로 다짐은 선명해지기만 했다. 그러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십 년도 넘게 지켜오던 다짐이 어느 우연하고도 사소한 일 때문에 깨지리란 건.
그저 지나가다 우연히 봤던 길 고양이였다. 깡마른 모습이 안쓰러워 어쩌다 보니 몇 번 먹이를 주게 됐다. 그러다 또 어쩌다 보니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보게 됐고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 데려오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냥줍’으로 데려온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왜 집사라는 명칭을 써가며 고양이를 모시는 걸까 참 궁금했었는데 그런 궁금증은 우리 집 뭉치를 키우면서 자연스레 해소가 됐다.
고양이는 부르면 오지 않는다. 고양이는 배웅을 해주지 않는다. 고양이는 산책을 다니지 않는다. 그러니까 고양이는, 그동안 내가 알던 반려동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밥도 자기가 내킬 때 먹고, 나갔다 돌아와도 내킬 때만 마중을 나와 주었다. 만져달라는 듯 옆에 앉아있다가도 손을 뻗으면 휑하니 가버리고 곧 다시 돌아와서 머리를 비비기도 했다.
아무래도 뭉치가 ‘길냥이’ 출신이다 보니 집냥이로서의 삶이 아직 어색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 까닭에 어설프게나마 사람을 따르게끔 훈련을 시켜보려 노력하기도 했었다. 사료 몇 알, 간식 몇 입으로 열심히 어르고 달래 가면서. 그러나 어쩐 일인지 뭉치는 도통 훈련이 되지 않았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쯤이면 강아지는 바뀌었던 것도 같은데 고양이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답답하기도, 힘이 빠지기도, 뭉치가 좀 이상한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부끄럽지만 괘씸하다는 생각도 조금 했다. 고된 떠돌이 생활을 접고 안락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데려와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강아지는 이만큼 해줬으면 이미 사람을 따르고도 남았을 텐데 쟤는 어떻게 고마워하지도 않는 거지, 정말 뻔뻔한 고양이 같으니! 하는 치사하고 좀스런 마음이 일었다. 그런 마음에 곱지 않은 눈빛으로 뭉치를 흘겨보고 있는데 뭉치가 문득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잠시간 이상한 자존심을 건 눈싸움을 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뭉치의 눈빛이 부끄러웠다.
사실 그랬다. 고양이는 강아지가 아니었다.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고, 뭉치 역시 뭉치일 뿐이었다. 그런 고양이에게 강아지 같길 바라고 심지어 강아지 같지 않다고 괘씸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니. 훈련이 필요한 건 고양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새오. 나는 뭉치애오.
여전히 뭉치는 부르면 오지 않는다. 뭉치는 배웅을 해주지 않는다. 뭉치는 산책을 다니지 않는다. 대신, 뭉치는 가끔 부르지 않아도 온다. 뭉치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세우고 마중을 나온다. 뭉치는 산책 대신 함께 낮잠을 잔다. 뭉치는 그저 자기가 있고 싶은 곳에 있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옆에 있고 싶을 때 있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을 뿐이다.
이처럼 뭉치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엔 뭉치의 성격이 ‘동물답지’ 않아 훈련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었지만, 그 한결같은 모습에 내 사고를 바꾸기로 했다. 세상에 ‘동물다운’ 것은 없고, 뭉치는 ‘자기다울’ 뿐이라고. 그러니 밖에서 살던 것을 데려왔으니 고마운 줄 알아라, 할 게 아니라 밖에서 살던 것을 내 마음대로 데려왔으니 뭉치가 너그럽게도 우리와 살아주는 것이라 생각하자고. 고양이의 발걸음은 유난히도 소리가 없는데, 뭉치는 내 마음에도 그렇게 다가왔나 보다.
고양이 키우기란 평생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뭉치와 함께 살게 된 뒤론 모든 고양이들이 달리 보인다. 고양이의 종 파악은 물론 고양이의 언어, 고양이의 장난감, 고양이의 꼬리, 고양이의 기분까지 느리지만 하나씩 알아가는 중이다.
그러다 최근에 문득 다시 보게 된 것이 유명한 소설의 제목,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였다. 전에는 그저 그런 제목이었다면 이제는 그 말이 ‘역시나’ 로 보인다. 역시나! 고양이는 고양이인 것을. 뭉치는 뭉치로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