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벚꽃이 내렸다. 가끔은 코끝에 닿는 것들로도 계절을 가늠해볼 수 있다. 겨울의 눈송이는간직하지 못했지만 벚꽃은 한 잎을 주워 다이어리의 한 페이지에 조심히 끼워놓았다. 켜켜이 쌓인 페이지 위로 납작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요 며칠은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여름에는 눈보다도 벚꽃보다도 더 오래, 비가 내린다.
장마, 라고 발음하면 가볍고 산뜻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부터 떠오른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비를 대비해 늘 우산을 챙겨들고 다녀야 하는 일, 지하철을 타고서 이동할 때 옆 사람의 축축한 우산이 내 종아리를 흥건하게 적시는 것,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하늘과 눅눅한 공기를 매일 대해야 하는 기분처럼.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것은 장대비에 푹 젖어버린 축축한 신발을 하루종일 신고 다녀야하는 일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발과 양말에서 물이 베어 나오는 기분이란! 젖은 머리와 겉옷은 몇 번 툭툭 털어내면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마르지만 어쩐지 한 번 젖은 신발은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마치 오래 전부터도 그 많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던 것 같이.
그 날은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의 세찬 비를 쫄딱 맞은 날이었다. 비바람 아래에서 유일하게 믿을 구석이라고는 샛노란 우산 하나뿐이어서 두 손으로 꼭 잡아들고 출근을 재촉하던 길이었다. 그리 좁은 길도 아닌데 모두가 우산을 펼쳐들어서인지 길들이 다 비좁아진 느낌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우산들은 거칠게 나를 치고 지나갔고 양 옆의 우산들은 어깨에 축축한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약이 오른 나는 더 이상 한 방울도 맞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우산을 머리에 바짝 붙인 채로 바닥만 보고 걸었다. 그 덕에 머리 하나는 간신히 가릴 수 있었지만 가장 젖지 말았으면 하는 신발은 우산 밖으로 비어져 나오고 말았다. 바쁜 출근길에 마음이 급한데 신발에 물이 튈 새라 조심조심 걸으려니 어째 한껏 더 급해지기만 했다. 푹 눌러쓴 우산 아래로 탁한 흙탕물과 그 위를 참방거리며 걷는 아이의 노란 장화가 보였다. 멀찍이 피해 걸어가면서도 군데군데 고인 작은 물웅덩이마다 눈을 흘겼다.
발이 빠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지하철역이 나오니까 도착할 때까지만 조심하자고 스스로를 부지런히 달래가며 걸어가고 있던 때였다. 멀리 지하철역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는지 화단 옆에 작게 고인 웅덩이를 보지 못하고서 그대로 발을 딛고 말았다. 단 한 번 잘못 디뎠을 뿐인데 차가운 빗물이 빠른 속도로 운동화를 다 적시고 양말까지 스며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황급히 옆으로 물러섰지만 이미 운동화는 색깔이 달라질 정도로 푹 젖어버린 상태였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신발에서 우스꽝스러운 소리와 함께 찍 찍 물이 나왔다.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바보 같은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함께 웅덩이는 왜 여기에 있어서, 하는 짜증이 머릿속까지 스며들었다. 지금껏 조심했는데, 지하철역이 코앞이었는데, 왜 하필, 왜 하필. 여태 물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들였던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이 한 순간에 무너진 것에서 오는 원망이 두서없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가 난 상태였으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터벅터벅 걸었다. 어차피 틀린 거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이었다. 이미 푹 젖어버린 신발로 걸으니 부러 피해서 돌아가야 했던 길들도 얼마든 내키는 대로 걸어갈 수 있었다. 작은 웅덩이도, 그보다 더 큰 웅덩이 위로도 성큼성큼 걸었다. 함부로 밟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흙탕물에서도 신발에 물을 잔뜩 튀겨가며 걸었다.
그러다보니 조금은 화가 누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이제는 내 발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걸어도 된다는 홀가분함까지도 느껴지는 듯했다. 톡 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따라 한동안 내 마음껏 걸었다. 아주 오랜만에, 노란 장화를 신은 아이의 천진한 발걸음을 흉내내보면서.
그때 알았다.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는 것을.
코끝에 빗방울이 스친다. 조금도 젖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우산을 붙잡고서 온 힘을 다해 버티던 내 자신이 저 길 위에 서있다. 두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힘겹게 잡고 있었던 것들이 있었다. 젖지 않기 위해 애썼던 여러 날의 밤이 있었다. 긴 장마가 물러간 뒤에야 조심스레 펴 본 손바닥에는 애쓴 밤의 흔적만이 손금이 되어 선연하게 남아있었다.
젖은 신발처럼, 다시 마르기까지 다시 아물기까지 유독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젖지 말아야 하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나는 온통 젖어본 뒤에야 알았다. 여러 계절을 돌아 온 내가 그 때의 나를 바라본다. 이제는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에, 또는 예고 없이 빠지는 웅덩이에 조금은 너그러운 자세로 대하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다이어리에 끼워놓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의 한 페이지에 빗방울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