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버금 Mar 21. 2020

가족이라는 이름의 서사 (2)

2월의 브런치 큐레이션 주제 '가족'


<#1 만남과 이별>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친구는 집에 식구가 하나 늘었다는 말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고, 저는 이후의 내용을 듣기도 전에 웃음이 먼저 나왔습니다. 식구는 단어 생김 그대로 '먹는 입' 인데 복닥복닥한 집에 그런 '입' 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게 눈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해서요.


  '가족'을 테마로 한 두 번째 챕터를 꾸리며 이번엔 어떤 글을 담아보면 좋을지 고심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렸고 새로운 식구와의 만남 그 이별의 이야기를 짝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


  세상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이별도 있습니다. 가족의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한 편씩 골랐습니다.






<만남> 김상아, '우리는 안아주는 사람일 뿐'


엄마, 나는 우리 개 주인이야.
너, 주인이 뭔지 알아?
응, 안아주는 사람이지.

엄마, 엄마는 내 주인이야.
왜?
나를 매일 안아주잖아.


  흔히 불리던 애완동물이란 단어를 대신해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이 자리잡은지도 오래. 동물을 안아주고 사랑해주어야 하는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반려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글입니다.


  자녀가 있냐고 물으면 "네, 1년 1견입니다" 라고 소개하신다는 작가님. 아기는 자라고 개는 늙는다, 고 작가님은 말합니다. 자라는 존재와 늙는 존재와 함께 살며 깨닫는 일상의 잔잔한 사유가 담긴 책입니다.


https://brunch.co.kr/@thursday5pm/30



<이별> 김금장화, '안녕, 아빠'



여덟 계절을 보내고 나서야 사랑하는 아빠의 이름 위로 덮어두었던 흰 천을 거두었다. 아프더라도 아빠의 죽음을 마주하고, 온전히 기억하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그 시작이다.

나의 세상에 이토록 귀한 사람이 있었다고, 너무 아프게 떠났지만 나는 그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혹여나 나처럼 이별을 외면하며 혼자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용기가 조금이라도 닿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찾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아마도 평생을 부표도 없이 헤맨다 해도 찾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온전히 이별하는 방법을.



  '안녕은 안녕으로. 안녕, 안녕.'


  안녕이라는 말, 만날 때에도 하지만 이별할 때에도 하는 인삿말이죠. 김금장화 작가님의 글을 읽기 전 제목을 먼저 보고선 '아빠' 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인지 생각하며 읽었는데,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온전히 이별하기 위한 인사였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도 안녕이라는 그 인사가 영영 이별이 아니라, 아직 보내지 못했던 '아빠' 에게 건네는 만남의 인사로 느껴졌어요.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이 글을 다루어도 될지, 무척 조심스럽기도 했는데요.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아빠를 기억하기 위한) 시작' 이라는 작가의 말에 저 또한 용기를 내어 글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부표도 없이 헤맨다 해도, 읽어주는 사람이 여기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요.


https://brunch.co.kr/@15seven13/1



<#2 자식과 부모>



<자식> 임희정,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임동명과 조순덕의 딸이다.' 나는 이 한 줄 소개가 제일 좋다. 이 문장은 사려깊은 편집자가 챙겨준 문장이었다. 그렇다. 내 책은 모자란 내가 깊은 마음을 가진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나는 쓰며 글 앞에서 매번 나의 미약함을 확인했다. 겨우 자식, 미미한 작가, 미력한 나였지만, 나는 그 '겨우' 를 사랑하기로 했다. 대충이 아닌 애써 얻은 '겨우' 였으니까.


  흔히 부모는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키워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자식 또한 절로 키워지는 게 아니라 겨우 되어가는 존재라 고백하는 이 책의 제목에 끌렸습니다.


  책의 추천사를 써 준 김원영 변호사는 작가의 가족 사진을 보며 ''이 글을 쓴 시간의 얼굴'이라 표현해주었다고 하는데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의 저자는 비단 한 명이 아니라 임동명, 조순덕, 그리고 딸 임희정 작가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겨우' 라는 말은 부정의 맥락과 어울리는 부사죠. '겨우' 이것 밖에 못 했어. '겨우' 다 했어. 다 못 하든, 결국 다 하든 '겨우' 가 붙는 순간부터 해내도 어쩐지 미비하고 초라한 느낌을 지우기가 힘든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만 작가는 '미미한 작가, 미력한 나' 를 표현하는 그 '겨우'를 사랑하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그렇게 '겨우' 자식이 되어 가니까 말이에요.


https://brunch.co.kr/@hjl0520/64



<부모> 이유미, '키우지 않고 함께 자란다'


그날도 아들에게 "아빠가 깊이 잠들었네. 우리 먼저 올라가자."라고 말하고 아들과 차에서 내렸다. 이미 밤 12시가 넘어서 얼른 아이를 씻겨 침대에 눕혔다. 늘 그렇듯 팔베개를 해주고 둘이 꼭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품에 안겨있던 아들이 조용히 말했다.

 "엄마, 아빠가 걱정돼."

설핏 잠들었던 나는 아이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걱... 걱정?! 걱정이란 말을 쓰다니. 놀란 가슴 진정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럼 아빠 데리러 갈까?" 아이는 고개를 세차가 끄덕였다.

내 아이가 똑똑해서, 지극히 감성적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훌륭하다는 것의 기준도 잘 모르겠다. 아이는 그냥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때론 나보다 커 보인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우린 함께 크고 있다.  


 이유미 작가님은 '키우지 않고 함께 자란다'는 글에서 아들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주었는데요. 마냥 어린 아기인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아빠를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철렁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때론 나보다 커보일 만큼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 언젠간 내 키를 넘어 훌쩍 클 아이. 겨우 되어가는 자식처럼, 겨우 되어가는 부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께 자라면서요.


https://brunch.co.kr/@yumileewyky/326






  가족을 테마로 만남과 이별, 자식과 부모라는 네 편의 글을 골랐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다양한 작가님들의  찾는 동안, 그리고 그 내밀한 타인의 역사를 읽는 동안, 저는 그 역사로부터 내 가족의 서사를 비추어 보기 위해 부러 오래 헤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다 깊이 공감하고 넓게 헤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  권과 글  편을 소개했습니다.



사진: onlyheya

말글: your_dictionary_

카카오TV: 바로보기

유튜브 : 바로보기


작가의 이전글 가족이라는 이름의 서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