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Unspokental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ex Feb 16. 2019

1983

전쟁이 지나간 자리의 홑청을 뜯으며

오늘따라 왜 이리 유난한 잠투정일까. 있는 듯 없는 듯 순하게 잘 놀다가도 한 번씩 이렇게 뒤집어져라 울어댈 때면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일단은 일으켜 안아 안심을 시키지 않으면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나는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꼼짝없이 아침나절을 다 보내고 말았다. 착하지, 착하지, 하다가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다가 어쩌란 말이냐, 나더러 어쩌라고 그래 우니, 하다가 결국은 나도 같이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을 무렵에 이르러서야 겨우 어린 숨이 고르다. 동여맨 포대기 끈을 풀어 조심스레 자리에 누이고 보니 아침 내내 악마같이 울던 얼굴이 미운 게 아니라 또 곱다. 동그라니 고운 이마에 포슬 한 배냇머리가 제법 길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나는 이미 네 명의 여자아이와 한 명의 남자아이를 품어 키웠다. 아침마다 끼니마다 한바탕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다. 다만 그 무렵엔 내 몸이 고되지 않았고 아이의 잠든 얼굴이 슬프지 않았다. 허리가 무겁고 무릎이 뻐근하다. 툇마루에 드러누워 한숨만 쉬었으면 좋으련만 벌써 해가 중천을 향해 간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이 넘도록 밤낮으로 장맛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모처럼 해가 난다. 옳지 싶어 안방으로 건너가 장롱 칸을 뒤적인다. 장롱 아래쪽에서 묵은 이불이 눅눅하게 세월을 머금고 앉아 있다. 볕으로 꺼내 찬찬히 살핀다. 한 땀 한 땀 여며둔 바느질은 얌전하니 그대로 있다. 참 단정하게도 시쳐두었다. 명주실을 따라 홑청을 뜯는다. 어찌 생각하면 아이보다 안된 것이 제 어미다. 처음 민우가 색시라고 데리고 왔던 날을 생각한다. 며느리의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 눈에 밟힌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그저 숙이고만 있었다. 그렇게 죄진 사람마냥 웅크리고 있던 모양이 아프다. 그 앙 다문 입술을 한 땀 뜯는다. 그날의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 아이와 나는 갑작스러운 인연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제 집에서는 오죽 속이 상할까 하여 나는 차마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준비를 서둘러 간소한 결혼식을 치르고 민우가 다시 군대로 복귀하고 나서야 우리는 난데없는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며느리에게 아이의 기저귀 갈아주는 법과 트림시키는 법, 젖병을 소독하는 법 따위를 일러주었다. 며느리는 언제나 고분고분하고 조용했다. 나에게 특별히 반대한 것도 불만을 가진 것도 없었다. 다만 두려워할 뿐이었다. 결국 제 아이를 버리고 떠나던 그날의 눈빛도 꼭 겁에 질려있었다. 무서운 것은 너만이 아니었다. 실은 나도 무서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홑청을 뜯는 족족 지친 솜뭉치가 드러난다. 재작년 겨울 무렵 솜을 틀어준 것이 마지막이었지 싶다. 오후에는 솜을 틀러 가야겠다. 네 아이는 귀엽지 않다. 예쁘지 않다. 외롭지 않다. 모를 일이다.




대구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남쪽에 있는 까닭에 전쟁의 무자비함이 그나마 덜 한 곳이었다. 북한군도 남단까지는 내려오지 못했고 하여 갈 곳을 잃은 자들은 앞다투어 대구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지친 삶을 둘러매고 질긴 생명을 끌어안고 남으로, 남으로, 행렬을 지어 끊임없이 내려왔다. 나른한 휴일의 새벽, 갑작스러운 남침은 서울을 죽은 도시로 만들었다고 했다. 괴로운 역사는 언제나 뒷덜미를 타고 온다. 죽음의 땅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남은 자들의 땅이 더욱 잔인한 것임을 그 무렵의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했다. 남은 사람의 삶이란 그들이 잃은 만큼의 깊이에서 시작한다. 견딤을 위한 일상은 또 다른 전쟁이 되었고 어쩔 수 없는 삶은 치열한 것이 된다. 내가 다니던 소학교 건물은 야전병원이 되었다. 운동장에는 다치고 병든 이들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줄지어 누워있었다. 상실과 현실의 경계는 무척이나 가볍고도 무심한 것이었다. 시내 외곽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판자촌이 들어섰다. 그 주변으로는 멀건 보리죽이나 찐빵을 파는 노점들이 생겨났다. 다음 장 날을 기약 않는 장터 부근에는 포항에서 부산에서 구호물자를 들여와 파는 떠돌이 장사꾼들과 군복을 검게 염색해서 파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역 앞에는 헤어진 가족들을 찾는 광고지들이 겹겹이 붙어있었고 그 사이로 구두닦이 소년들과 걸인들, 매춘부들이 머무르고 사라졌다. 낯선 이웃들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두 배로 세 배로 늘어났다. 그 치열한 삶의 행렬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헛간은 물론이고 다리 밑까지 빼곡하게 들어 찬 거친 생명들이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족을 잃었다. 몸이 아프지 않으면 마음이 아팠다. 모두가 유행병처럼 건조한 현실을 앓고 있었다. 나는 아픈 사람이 보기 싫었다. 배를 곯는 아이를 보는 것도 싫었다. 슬픈 이야기도, 전쟁 이야기도 싫었다. 아무도 나에게 언제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고 세상에서 나를 제일로 귀여워해 주던 오빠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계속해서 일어났다.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매일매일 잃어버렸다. 밤이 되면 늘 악몽을 꿀까 두려웠다. 어디에나 만연한 서러운 이야기들이 모기처럼 파리처럼 사방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나를 일으켜 깨우곤 했다. 나는 언제나 이불을 정수리까지 덮어쓰고 선잠을 잤다.




아버지는 유서 깊은 가문의 종손인 데다 대구에서 제일 큰 개인 병원을 갖고 계셨다. 어머니는 얌전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어떤 일에도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부모님은 슬하에 다섯 남매를 두셨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고명딸이었고 어릴 적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외롭거나 배가 고프거나 슬프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아버지는 급작스러운 징집으로 불려 간 세 아들을 3개월 만에 내리 잃어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할 수 없이 막내 해준이를 배에 태워 일본으로 보내려고 하셨다. 막내는 부모님 곁을 떠나기 싫어 격하게 고집을 부렸고 울고 드러눕고 소리를 질렀지만 끝내 고모의 손을 붙들려 일본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삼일 밤낮을 곡기도 거른 채 통곡했고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전쟁은 대구에도 찾아왔다. 총칼도 없이 모두를 찔러 죽였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피난민을 거두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셨다. 꾸역꾸역 밀어닥치는 피난민들을 위해 숙소를 새로 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병들고 다친 이들은 따로 거두어 치료를 해주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가세도 더 이상 예전 같지가 않았다. 화폐가치는 하염없이 떨어졌고 물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으며 사람들은 돈이 없었다. 의식주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농사를 지었다. 당장 부족한 식료품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농사 외에는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강한 이들은 끼니를 보수 삼아 아버지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자식들을 잃은 노인들과 지아비를 잃은 아낙들이 토양을 고르고 퇴비를 주고 씨를 뿌렸다. 땅은 말없이 씨를 품고 비를 먹었다. 싹은 자라고 열매는 여물었다. 나는 더 이상 학교 가는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빠들의 사진을 꺼내 보지 않았고 밤이 되어도 이불을 덮어쓰지 않았다. 밭에 나가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과거를 슬퍼하거나 미래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곧잘 노래를 불렀고 땅은 언제나 태연했다. 감자를 뿌린 곳엔 감자가 났고 고추를 심은 곳엔 고추 꽃이 피었다. 그곳의 우리는 다만 인내하면 되었다. 하여 그때의 우리는 드러내어 아프지 않았다.


홑청을 다 뜯어낸 솜뭉치들을 본다. 군데군데 눈물자국 같은 얼룩이 피어있다. 밤이 새도록 붙잡고만 있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편지마냥 처량한 모양이다. 무명 보자기를 깔고 둘둘 말은 솜뭉치를 내려놓으니 둔탁한 소리로 널브러진다. 먼지도 별로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습기를 단단히 먹었다. 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에게 최고급 목화로 솜을 해서 말끔한 비단 이불을 지어주셨다. 지아비 잘 섬기고 아들딸 농사 지어가매 금슬 좋게 해로하라고, 남김없이 벗겨진 금침에 비친 어머니는 삼십 년째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 고운 엄마. 눈두덩에 열이 오르더니 욱신하다. 무릎으로 엄마를 꾹꾹 눌러가며 보자기를 단단히 동여맨다. 시간은 늘 부질없이 흐르는 것이었고 사연이란 언제나 새삼스러운 것이다. 넓은 방 한가운데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보따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 얄궂은 모양 아래로 붉은 비단 홑청이 흘러간 시절의 허물처럼 구깃구깃하다. 거두어 이리저리 쓰다듬어 본다. 적잖이 지친 비단은 군데군데 보풀이 일었거나 자수 실이 끊어져있다. 보풀이야 손 가위로 한참만 잘라내면 어느 정도 수습이 되겠지마는 끊어진 자수 실들은 어찌 손 쓸 도리가 없다. 나는 자수를 배운 적이 없다. 어릴 적 고상한 어머니의 취미를 신기하게 구경한 적이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자수 같은 것은 시간 놀음이라며 굳이 가르치지 않으셨다. 설사 배웠다고 할지라도 나는 차마 손대지 못할 것이다. 황금빛이 고운 나비는 더듬이를 잃었다. 진분홍 연분홍 꽃들은 저마다 꽃잎이, 잎새가 조금씩 상해 있다. 나는 실이 뜯어져 나간 꽃잎을 부질없이 여며보다 그만 두기로 한다. 오늘은 그냥 두자. 내일은 잘 빨아 말려서 풀을 먹여야겠다. 홑청을 반듯하게 개키는 와중에 고이 자던 아이가 운다. 아이에게 달려간다. 꼬물대는 모양새를 보니 혐의는 아무래도 기저귀에 있다. 한 여름빛이 쨍 하니 뜨거운 뒷마당으로 나간다. 이른 아침 빨아 널은 열 두 폭 흰 기저귀들이 가만히 햇빛을 먹고 있다. 눈앞에 드리운 한 폭을 걷어 내리니 멀리 대추나무 옆으로 벤치 프레스가 빠끔하다. 중학생의 민우가 송글 하니 땀이 맺힌 얼굴로 스물 하나, 스물둘, 무거운 쇳덩이와 씨름을 한다. 귀한 아들. 남편은 네 명의 딸아이를 보고 나서야 얻은 장남에게 아낌이 없었다. 퇴근길이면 종종 손에 과일이나 새 운동화 같은 것을 사 오곤 했다. 언제나 민우의 것이었다. 네 딸들은 그런 것에는 익숙해있었다. 남편은 딸아이들과 겸상을 한 적이 없다. 아들이 아닌 자식들은 다른 상에 따로 밥을 먹었다. 아버지 상과 차려진 반찬이 달라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내 딸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머지않아 나는 혼자가 되었다. 민우도 이내 쇳덩이를 내려놓고는 대문을 나선다. 아들은 더 이상 중학생이 아니다. 지난달에 제대를 하고 서울로 취직을 했으니 이젠 명절에나 가끔 들릴 것이다. 아들은 아이가 있다. 아이는 아버지가 없다. 어머니가 없다. 젖지 않은 기저귀가 없다. 순간 정신이 들어 기저귀를 접어가며 아이에게 향한다.


앙칼지게 우는 눈망울이 어찌 이리 서러울까. 새벽 별이 비치는 우물 같다. 토실한 두 발을 잡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젖은 기저귀를 새것으로 바꾸어준다. 행여나 짓무를까 분을 뿌리려는데 파우더가 떨어졌는지 두어 번쯤 힘겨운 가루를 토하다 멈춘다. 나는 새 파우더를 꺼내기 위해 뻐근한 무릎을 세우고 벽장을 연다. 8개의 미제 존슨즈 베이비파우더가 국제 우편 박스 안에 가지런하다. 큰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산에서 국어선생을 할 때도, 미국으로 시집을 갈 때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했다. 딸아이는 먼바다로 갔다. 이따금씩 미제 화장품이나 옷가지들을 보내오긴 하지만 얼굴을 본 지는 10년이 넘었다. 저도 맞벌이하랴 두 아들 키우랴 먹고살기 바빠 한국까지 나올 정신도 없겠지마는 나 역시 그 먼 길을 떠날 엄두를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편이 그 마음을 헤아려 줄리 없다. 처음에는 종종 국제전화도 넣고 하더니만 요새는 그것도 많이 줄었다. 둘째도, 셋째, 넷째도 제 언니를 따라 미국으로 캐나다로 떠난 지 벌써 수년이 흘렀다. 소포와 함께 온 편지에는 가엾은 조카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아직 민우에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나은 방법도 아직 찾지 못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갈 곳이 없다. 전쟁도 나지 않았는데 모두를 떠나보냈다. 가난한 아기가 가난하게 나를 쳐다본다. 새 파우더의 봉인을 뜯어내니 딸아이의 냄새가 난다. 나의 첫아기는 지금 이곳에 없다. 꾸물대는 보드라운 살결에 무심한 파우더가 피어오른다. 젖은 기저귀를 갈고 나서도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배가 고픈가 하여 어린 배를 만져본다. 그러고 보니 해가 중천을 넘었다. 부엌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남편은 오늘도 술을 마실 것이다. 시원한 국을 끓여놓지 않으면 또 잔소리를 듣겠지. 솜 틀러 다녀오는 길에 북어 한 마리, 무 한 뿌리를 사야겠다. 울음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진다. 서둘러 젖병에 분유를 넣고 물을 붓는다. 잰걸음에 달큼한 분유 냄새가 출렁인다. 나는 재빨리 저고리 고름을 말아 앞섶에 찔러 넣고 아이를 안아 올린다. 젖병을 물리자 아이는 몽글한 두 손을 불끈 쥐고는 악착스레 젖병을 빤다. 젖병을 쥔 내 손이 하릴없이 휘둘린다. 악착같은 생명을 나는 무서워했다. 단 잠이 깬 아이의 서러운 사연을 추스르고 나니 한 낮이 되었다. 매미가 운다. 내 굽은 등 뒤로 터질듯한 목화솜 보따리가, 곱게 개켜둔 비단 홑청이, 가만히 아이의 젖 먹는 소리를 듣는다. 어여 먹어라. 어여 먹고 솜 틀러 가자.


구독자 16
매거진의 이전글 Los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