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카이스트에 모금이 잘 될까
지난번(카이스트의 시대..1) 글을 올리고 나서 얼마 후에 존경하는 양호승 회장님(전 월드비전 회장)께서 전화를 주셨다. 가끔 인사를 드리는지라 반갑게 최근의 안부를 몇 마디 여쭈었는데, 잘 지내신다는 말씀을 간단히 하시면서 다짜고짜 "왜 카이스트가 요즘 모금이 잘 되지? 황신애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이런 게 참 궁금해~!"라는 질문을 던지신다.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을 몹시 유쾌하다고 말씀하셨다. 호기심 많은 젊은이의 어떤 즐거움과 같다고 느껴졌다.
이미 나의 대답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다. 대학의 내부자로서 또는 외부 전문가의 입장에서, 국립대학과 사립대학, 4년제 대학과 2년제 대학, 특수대학 등 여러 대학의 모금을 직간접적으로 실행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충의 기준점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생전 처음 보는 어느 대학의 모금 상황을 통밥으로 진단을 해봐도 어디서 문제가 생기는지 왜 일이 작동되지 않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일이 되게 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말하기 쉽지 않다. 마치 주사위 100개를 상자에 넣고 한꺼번에 던졌을 때 모든 주사위의 값의 합이 200 이하로 나오는 확률이 매우 낮지만 사전에 주사위의 배치와 던지는 힘과 높낮이를 어떻게 조율하면 그렇게 나올 수도 있는 것처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조건을 설정하고 어떤 조작적인 행위를 해야 하고, 여러 변수를 통제해야 하고 실제로 적절하게 실행까지 해야만 답을 얻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종합적으로 여러 여건이 맞아야 하고 각 조건과 실행 주체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어떤 적합한 조건에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모금이 잘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 몇 가지 잘 되는 조건들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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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카이스트는 개교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는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대학에 있어서 그리 유구한 역사라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교 후 50년이 되었다는 것은 졸업생이 50년간 배출되었고, 1회 졸업생의 나이가 6-70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대학의 동문이 사회에 진출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다시 학교를 돌아보고 지원할 수 있게 될까. 50세? 글쎄다. 나이가 50세쯤 된 동문이 '성공한 동문 선배'로서 모교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50세가 되면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돌아보게 되고, 무언가를 해볼 양이면 적어도 나이 육십이나 되어야 하고, 그때쯤에는 자신이 이루어온 것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의 결과(이제 사회적인 기여를 좀 해 볼까 하는 식의 마음가짐), 즉, 영향력을 공식화하곤 한다. 즉, 대학이 문을 열고서 배출한 첫 졸업생이 평균 60세 이상이나 되어야 겨우 모교를 돌아볼 형편이 되는 셈이니, 최소한 개교 40년이 지나지 않으면 모교와 졸업생의 멋진 '랑데부'를 꿈꾸기 어렵다는 뜻이다.
카이스트 동문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과학기술, IT, AI, 디지털, 블록체인, 그게 무엇이든 요즘 세상에서 가장 '최첨단'에서 카이스트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분야의 걸출한 인재들은 젊은 나이부터 탁월함을 창출해냄으로써, 30대나 40대에도 성공한 사업가, 성공한 과학자, 성공한 개발자가 되어 신흥 부자 리스트에 오르내리곤 한다.
동문들이 발전기금을 기부할 수 있을만한 여력을 갖추는 것은 대학의 발전기금 모금 활성화의 기본 조건이 된다. 카이스트는 우리나라 대학 중에 다소 뒤늦게 출발했다. 그동안은 동문들이 젊은 층에 있어서 모교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에 다소 아쉬운 점이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비로소 동문들이 20대에서 70대를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대학으로서는 '완전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성원들의 다양성은 모금에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된다. 동문들이 다양한 연령층에 골고루 섞여있으니, 모교에서는 필요할 경우 동문들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부끄러운 것은 감추고 싶어 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모교가 자랑스럽게 느껴지는가? 이에 대한 답은 개인마다 다르다. 더 높은 목표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원하는 바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차선으로 선택한 길은 평생 아쉬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이들은 그 길도 대단하고 멋지다고 평해주지만 스스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감추고 싶은 비밀이 되기도 한다.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선택한 학교가 평생 모교(alma mater)라는 이름으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이유야 어떻든 그 학교는 나의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력서에 한 줄로 남는 정도가 될 수도 있지만, 모교가 나날이 발전하는 상황이고 내가 소위 '잘 나가는' 대학의 졸업생이라면 사회에서 기지개를 한 번 켜도 될 만큼 내 입장도 덩달아 살아나게 된다. 대학들의 평가나 입학 순위 랭킹에서 모교가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들으면 동문으로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사회에서 잘 나가는 기업인과 주목받은 인사가 나와 동문 사이이라면 그를 만나본 적이 없어도 마치 내 가족이 잘 되는 일인 양 어깨를 으쓱한다. 멋진 졸업생들을 계속 배출하고 나날이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대학, 동문으로서는 다시 돌아볼 마음을 갖기에 충분하다.
졸업생들이 자랑스러워하고 고마워하는 브랜드를 가졌는가? 대학들은 스스로 이 질문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졸업시켜 줬으니 모교를 기억해줘'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제 그만 접어두자. 카이스트는 이 지점에서 졸업생들에게 대단한 프라이드를 안겨준 것이 맞다. 동문들이 학교에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때 모금활동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비교 불가한 브랜드가 카이스트에 만들어졌다. 물론 카이스트 말고도 더 젊은 대학 중에 훌륭한 과학대학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그 대학들의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충분히 영광을 드러낼 만큼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비교불가다. 그리고 카이스트는 계속해서 그 우위를 지키고자 노력할 테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다른 대학들도 이에 대해서 깊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들이 해결해야 할 정말 중요한 과제 중에 '어떻게 동문들이 자랑스러워할 좋은 브랜드를 만들 것인가'라는 것은 주기적으로 노력하고 점검하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있는 사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대학에는 브랜드를 따로 신경 쓰는 부서나 기능이 전혀 없다. 브랜드는 실무부서의 역할도 필요하지만 최고 의사결정자의 숙제이기도 하다. 대학의 총장이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골라 집중해야 한다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브랜드 문제가 되어야 한다. 좋은 브랜드는 좋은 역량을 기초로 만들어지니, 장기적인 안목에서 대학의 고유한 강점과 중점분야를 잘 파악하고 브랜드로 키워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대학 리더십의 우선순위에 포함되어야 한다.
모금 활성화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리더십의 의지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해도 리더십이 할 마음이 없으면 모금은 불가하다. 돈은 다스리는 자에게 온다. 다스릴 마음이 없는 사람의 수중에는 돈이 고일 여지가 없다. 대학의 모금도 마찬가지다. 총장의 뜻에, 반드시 모금을 해내야만 한다는 확고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선비'들로 가득 찬 캠퍼스에는 돈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수밖에 없다.
리더십이 성패를 결정하는 99%의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침도 모자람도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조직이든 모금이 잘 실행되도록 움직이려면 초기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필요하다. 멈춘 자동차를 움직일 때 처음에 바퀴를 굴러가도록 하는 것에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것과 원리가 같다. 그 초기 움직임을 위해 충분히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할 수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모금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적절하게(proper condition; 6 rights라고 미국의 모금전문가 Weinstein의 책에도 나온다) 다 맞아떨어져야 작동이 된다. 그런 모든 조건들을 적절한 수준으로 맞추어주는 초기 점검 작업은 대부분 리더십의 강한 의지로만 가능하다. 카이스트에서 최근에 '도대체 누가' 그런 역할을 했는지 아직 나도 자세한 스토리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부터 서남표 총장님을 비롯해서 조금씩 그런 역할들이 누적되어 왔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카이스트뿐만 아니라 연세대학교의 송자 총장님, 서울대학교의 이장무 총장님, 숙명여대의 이경숙 총장님 등 모금을 잘했다고 평가받으신 분들의 공통점이 바로 그 의지를 명확히 표명하시고 스스로 앞장서셨다는 점이다.
모금 명분에 대해 잠깐 말하려고 한다. 예전에 내가 대학에서 모금할 때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에서 발전기금의 영어 표현을 'fund for development'라고 썼다(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development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보면 '조금 쳐진 상태를 더 낫게 개발'할 때의 의미가 많다. 언뜻 듣고서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외국 대학들의 웹사이트를 들락거리면서 그들이 용어를 보니 develpment라는 단어가 아닌, advancement가 있었다. 어감이 확 느껴졌다. 대학의 주된 목적은 '연구와 교육'이다. 사회의 현재를 지탱하는 교육체계이기도 하지만,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와 교육은 20년 후, 40년 후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재의 졸업생이 10- 20년 후 학부모가 되어서 새로운 자녀세대의 가치관을 좌우할 사람들이 되고, 3-40년 후에는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치인, 경제인, 학자 등이 그중에서 나올 터이니 말이다. advancement는 '한 걸음 더 앞서 나가는 진보'라는 뜻으로 쓰이고 미래를 지향하는 단어이다. 결론적으로 대학의 활동이 내포하고 있는 미래지향적인(moving forwards) 의미는 development가 아닌 advancement에 담겨있다고 나는 해석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대학의 리더십이 모금에 임하는 자세가 미래를 위한 투자자금으로서의 발전기금의 명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대학이 가진 현재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자원으로서의 발전기금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금의 메시지가 궁핍하다.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거나, 장학금이 없어서 좋은 학생 선발이 어렵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식의 메시지는 대학들이 흔히 브로셔에 많이 쓰는 표현인 '밝은 미래(bright future)'를 보여주기에는 너무 암담하다.
카이스트의 내부 리더십과 동문들의 핵심 멤버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대학이 미래를 앞서가기를 희망했고, 미래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 지금 무언가를 하겠다는 선언적인 말들을 한다. 게다가 대학의 총장과 교수들 나서서 이러한 일들(모금)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하니 동문들은 이에 호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리더가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은 호응을 하지만 리더가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침묵한다. 결국 의지가 있고 실천하는 리더가 모든 것의 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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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말씀드리고 나니 양호승 회장님께서는 재미있게 들었다고 하시면서 '나도 하나 보태볼까?'라고 말씀하신다.
<카이스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3, 길게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