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이글거리던 땅, 스페인
A said :
7.23 Badajoz AM 01 : 06
밤새 탈 버스 옆자리에는 아주머니가 앉아 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인상 좋은 아주머니와 서로 눈인사도 주고받고 감사하게도 물까지 건네받는다. 다만 몸집의 부피가 만만치 않았던 덕에 감당해야 하는 불편함이 흠이라면 흠일까. 거친 운전에 흔들릴 때마다 옆자리와의 충돌이 반복된다. 그 덕에 새벽이 다 되도록 선잠도 이루지 못한 채 의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내내 팔에 힘만 잔뜩 들어간다. 잠시 쉬어가는 기착지에 들러 버스가 멈추고 나서야 손잡이에서 손을 놓는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동승객들이 한밤중인 가운데 잠도 들지 못한 덕에 몸을 움직일 겸 밖으로 나선다. 내려서자마자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터키인 운전기사가 어깨를 두드린다. 눈이 마주치자 찡긋하며 본인 짐을 들어 보인다. 곧 터미널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운전석에 앉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터키인 기사는 자신은 이제 간다며 손을 흔들면서 한 치 앞이 보일까 싶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향하는 목적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오른다.
7.23 Lisbon AM 10 : 50
피곤한 몸이 내내 밤을 새지 못하고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도착했다고 알리는 듯한 방송이 들린다. 하지만 차창 밖이 여전히 컴컴한 것이 당황스럽다. 예정 도착시간은 아침 7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는데 시곗바늘을 보아하니 숫자 4를 가리키고 있다. 언제는 4시간 연착을 하더니 이제는 바라지도 않던 조착이라니. 극과 극을 달리는 이날들이 퍽이나 당황스럽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처음으로 내려선 포르투갈 땅은 한기가 가득하다. 한여름이지만 바닷가여서 그런지, 새벽이슬 때문인지 엄습하는 한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직 어둠이 가득한 새벽이라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주변의 화려한 건물들이 오히려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부추긴다.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순간 멍해진다. 아침에 도착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중심가로 이동한 후 숙소나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할 요량이었는데, 당황스럽게도 첫 단계부터 계획이 어그러진다. 함께 버스를 탔던 이들은 마중을 오는 차를 타고 가거나, 어딘가로 알아서들 잘 사라진다. 터미널을 벗어나야겠다 싶어 자전거를 끌고 걸어 나간다. 터미널 근처라 큰 호텔이나 화려한 건물들이 보이지만 이 시간에는 그림의 떡이다. 어디 구석에 쭈그려 앉아 첫차를 기다릴까 생각도 해보지만 공기가 너무 차다. 가방에는 여름옷 가지 몇 벌뿐이라 마땅히 껴입을 옷도 없고 애꿎은 이빨만 딱딱거린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들을 생각 없이 걸어 다니다 안내도를 발견한다. 간단한 지도여서 그런지 도심까지 거리는 있어 보이지만 가는 길이 까다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마땅히 방법도 없고 일단 가보자 싶어 안장에 오른다. 생소한 포르투갈어가 가득한 표지판 속에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단어 ‘Central’을 가리키는 화살표만 쫓아간다. 두려움이 가득한 출발이었지만 어두컴컴한 새벽에 자동차 없는 차도를 홀로 달리는 기분이 꽤나 즐겁다. 마주쳐오는 새벽바람이 여전히 차갑지만 가만히 걸어 다닐 때보다는 훨씬 훈훈해진다. 자꾸 나오는 언덕길에 어느새 목덜미에는 땀이 흐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도심까지 가는 길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간단해 보이던 안내도를 곧이곧대로 믿고 출발했던 아둔한 머리가 점점 아파온다. 자전거를 몰고 자동차들이 다닐 도로를 달릴 땐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아무도 없는 차도 한가운데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는다. 찻길에서 홀로 달리는 것이 점점 익숙해질 때쯤 만난 기나긴 터널 길에서는 괜히 통쾌한 기분에 울림이 끊기지 않는 환호를 지른다. 맘껏 헤매면서 1시간쯤 달렸을까, 휑하던 교외가 끝나가고 번듯한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간만에 만나는 행인들도 드문드문 보이던 찰나에 커다란 M자가 인상적인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한다. 너무도 반가운 맘에 얼른 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 잔 사 들고 자리에 앉는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커피가 너무나 달게 느껴진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휴대폰으로 겨우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 예약을 하고 다시 페달을 굴린다. 주택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터라 번지수를 알고 찾아도 쉽게 찾지 못한다. 겨우 찾아 문을 두들겨 보지만 응답이 없다. 아침 7시면 일어나야 되지 않나 괜한 심술에 더 세게 발로 차 보지만 여전히 조용하다. 할 수 없이 숙소 앞에 있는 계단에 기대어 앉아 한두 시간을 졸다 깨다 한다. 힘들게 겨우 입성한 게스트하우스는 외관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집에 온 느낌이다. 실제 아파트 한 채를 개조한 숙소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또래의 친구들이 한가득이다. 다들 즐거운 표정이지만 피곤에 절어 있는 누군가는 얼른 침대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본능에 충실하게 가방도 옷도 하나 손대지 앉은 채 쓰러져 버린다. 나무 침대에서 나는 향긋한 내음이 너무 기분 좋다.
P.S.1. 당장이라도 자고 싶어 침대 위에 픽 쓰러졌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나고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주위에 미칠 민폐도 걱정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간단히 준비되어 있는 시리얼과 식빵이라도 먹기 위해 테라스로 나가보니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동숙객들이 여럿 보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끼니를 때우는데 수염과 머리카락 덕분에 얼굴이 잘 안 보이는 친구 한 명이 맞은편에 앉으며 ‘오느라 힘들었나 봐’ 하고 말을 건넨다. 그 말에 스스로 차림새를 보니 여전히 안장 위에서의 복장 그대로다. 절로 나오는 실소와 함께 ‘Maybe’라고 답하자 역시 웃는다.
- 자전거 끌고 들어오던데 어디서부터 온 거야?
- 난 한국에서 왔고 여행의 시작은 암스테르담
- 이 날씨에? 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라고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낄낄대는 웃음이 어째 말하는 그쪽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 넌 어디서 왔는데?’
- 난 노르웨이. 벨기에에서부터 범선(tall ship) 경주가 있어서 범선을 타고 어제 리스본에 도착했지
- 배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범선 경주는 또 뭐야?
- 큰 돛 달린 배. 해적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옛날 배들 있잖아. 큰 돛으로 바람을 이용해서 경주를 하는 거야. 벨기에에서 출발해서 보름 정도 걸렸어. 이것 봐. 진짜 재밌었어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경주가 벌어지는 동안 찍었던 사진을 보여줬다. 분명 재미있었다고 말하면서 보여주는 사진 속에서는 바닷물에 흠뻑 젖은 선원들이 결코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커다란 배 위를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끔 다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있었지만 즐거운 표정들은 다 어디 갔는지 쉽게 찾지를 못한다. 하지만 이 친구의 표정은 사진들을 보여주는 내내 상글벙글하다. 심지어 리스본이 끝이 아니란다. 스페인 남부까지 돌아 나와야 하는 경주는 아직 반도 더 남았다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입에 머금던 우유를 질질 흘리며 나오는 실소가 멈추지 않았다. 털북숭이 친구와 이야기를 마치고 샤워를 하며 불현듯 머릿속에서 좀 더 많이, 멀리 보겠다고 여행을 떠날수록 마치 약을 올리듯 세상도 더욱 커지는 느낌이 든다. ‘아직이야’라고 약을 올리듯 닿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이 갈수록 많아지는 상황이 기쁜 것인지, 원망스러운 것인지 홀로 복잡한 머리를 붙잡고 끙끙댄다.
T said :
DAY 29
-
운은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쓰레기가 생기면 쓰레기통을 찾고,
없으면 그냥 주머니에 넣는다.
언젠가 엄마가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는 걸 보았다.
‘엄마 반만 닮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엄마처럼
길가에 있는 쓰레기까지 줍고 싶지는 않았다.
뭐 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엄마보다 속이 좁은 나는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도 불운이 따르면
더 화가 나고 억울할 것만 같다.
-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찬희가 있을 땐 든든했다.
그땐 2:2의 싸움이었다.
내가 밀리면 찬희가 도와줄 수 있었고,
찬희가 힘들 땐 도움이 되려고 했다.
1:1이 되고 나니 두렵다.
상대는 똑같이 덤벼오는데 내가 약해질까 봐,
삐끗해서 0.9가 될까 봐,
그래서 시합에서 질까 봐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