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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은 가장의 무게를 덜어줄때

가족부양 줄이고, 하고싶은 일을 할 때

by 데레사

남편이 30여 년간 몸담았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년이 불과 3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다. 이 결정은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행위를 넘어, 오랫동안 적성에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고 가족이라는 무거운 책임감 아래 억눌러왔던 '자아실현'의 마지막 시도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이직을 택했던 입사 동료들과 달리, 남편은 현실적인 불안정성 때문에 주저해 왔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제자리 찾기'를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는 거다. 책을 읽으며 그의 안에 꿈틀거리던 자아가 이제 불쑥 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 같다.


남편의 이직 결정에는 현실적인 타이밍 계산이 작용했다. 남은 3년의 정년 기간을 보장받는 대신, 곧 시작될 임금피크제를 통해 급여가 약간 삭감될 예정이었다. 이직을 통해 지금 당장 월급봉투는 줄어들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 노후 연금 수령 전까지의 공백기를 채울 수 있는 마지막 커리어 전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이 가져오는 재정적 파장을 직시해야 했다. 작년에 나 역시 오랜 직업 활동을 정리하면서 이미 가계 수입은 많이 줄어있었다. 퇴직 후 연금을 수령하기 전까지의 기간은 우리 세대가 피할 수 없는 소득의 깊은 골짜기다. 남편의 급여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 골짜기를 더 깊고 길게 건너야 함을 의미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남편의 눈빛에 감정적으로만 동조해서는 안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만족도는 높이되, 줄어든 수입을 기반으로 비상 자금 규모와 생활비 구조를 냉정하게 재점검해야 했다. 남은 3년간의 지출 계획을 보수적으로 짜고, 불필요한 고정 지출을 최소화하는 노후 준비 2차 재정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그 첫번째가 자신의 신용카드를 없애니까 내게도 카드 사용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카드사용을 함으로써 몇 만원의 포인트가 적립된다며 안 된다고 하자,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만성질환을 가진 채, 몇 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도 큰 아이가 4살부터 맞벌이를 시작했고 이 글에서 공개할 수 없는 우리 가정의 어떤 사정이 있어도 독박육아, 살림을 하며 알뜰하게 살았다. 그런 내게 카드 얘기를 꺼내니 어이가 없었지만, 가계재정에 이정도의 관심을 10년만 일찍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절절이 가슴을 헤집었다.


남편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은 긍정적인 변화지만, 그의 오랜 습관 중 하나인 음주는 여전히 끈질긴 걸림돌이다. 술자리의 횟수는 줄었을지라도 주량에는 변화가 없고, '건강을 위해 맨발 걷기를 한다'는 이유조차 '술을 더 기분 좋게 마시기 위해서'라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술은 그의 지난 세월, 퍽퍽한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해준 '달콤한 유혹'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는 노후의 건강과 행복을 갉아먹는 '리스크 요인'으로 변질되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편을 보며 묵묵히 모든 뒷감당을 했던 지난 시간을 이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감정적인 잔소리 대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절제 규율'을 설정해야 했다. 그 전에도 얼마나 많은 규율을 설정하고 애원하고 협박까지 했는지 모른다. 그 때는 불안과 우울이 뒤섞인 나의 내면의 힘이 약했다.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남편의 새로운 시작은 '온전한 자신'을 찾는 과정이며, 온전한 자신은 건강한 몸과 정신에서 비롯된다. 스스로도 절제를 한다고는 하지만 수 십년의 습관과 인간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남편과 나의 주직업 종료는 노후대비 불안정이라는 당면과제를 안겼다. 둘다 재테크에는 문외한이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는 교육, 심리에 관심을 가지며 살았고, 남편은 취미와 술, 모임이 관심사였다. 지난 30년동안 부동산 폭등, 폭락을 몇 번을 거쳤지만 한 번도 수익을 내지 못했다. 나름 사정이 있었지만 결과는 그랬다. 그 부분은 지금도 가슴 한켠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주식은 빨간색이 도배를 하고, 언론에서 떠들정도에야 오잉? 하며 문맹을 깨친 사람처럼 주식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강물일 때는 위안을 삼곤했다. '주식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야.'라며.


얇아진 지갑과 끊임없이 날아드는 지인 부모들 조사, 자녀들 경사에 통장 잔고가 달랑거렸다. 남편의 이직은 이 짐을 내려놓는 행위가 아니라, 이 짐을 한 손에 들고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힘을 기르는 과정이어야 한다.

남편은 이직 후, 몸은 더 힘들지만 마음은 가볍다고 했다. 몸보다 마음이 가벼운게 더 중요하니까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다. 책을 통해 조금씩 자아를 찾아가며 비로소 재테크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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