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가족독서토론회
매월 첫째 주 일요일 저녁은 우리 가족 독서토론회 날이다. 엊그제 두 번째 모임이 열렸다. 지난달 첫 토론회 이후 단체 채팅방에 몇 번 공지를 했음에도, 딸들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문해력과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하루 이틀 만에도 한 권을 거뜬히 읽어낼 수 있는데도, 차일피일 미룬 결과였다. 결국 토론회는 남편이 읽은 책들을 소개하고 인상 깊은 문장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남편의 공책에 빼곡히 적힌 문장들의 핵심 단어는 '공부', '꿈', '잠재력', '자신감', '성공'이었다. 곧 60대를 바라보는 중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이 단어들은, 마치 20대 청춘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설렘을 담고 있었다.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한다면 우리 안에 감춰진 잠재력이 발휘됩니다.” “자신의 꿈을 응원하고 격려하십시오. 성공하고 싶다면 먼저 꿈을 가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꿈을 긍정하고 쉼 없이 스스로 배우고 다듬으며 자신의 꿈을 격려하십시오.” “‘할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해내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산도 옮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성공할 것이라 믿는 순간, 당신은 이미 성공의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공책 뒷장에는 남편이 꿈꾸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 뒷산에 잡풀로 방치된 국유지 공터를 주민들이 활용할 방안을 구상하고, 시청 담당자와 통화해 보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또 친구의 펜션과 주변 땅을 활용해 친구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스케치해 놓았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고 수익과는 거리가 먼 일들이었다. 하지만 문득 거제도 외도 보타니아를 일군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섬을 만들 때 모두가 미쳤다고 했지만, 지금은 전국적인 명소이자 수익을 창출하는 장소가 되었다. 남편은 마치 강의라도 하듯 딸들에게 책을 읽으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열변을 토했다.
남편의 열띤 발표를 듣던 딸이 입을 열었다. "우와, 아빠가 신기하네요. 저런 말을 다 하고, 말도 잘하는구나. 아빠를 보니까 나도 진짜 책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 말이 없던 남편이 술술 말을 쏟아내는 모습이 딸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멍석을 깔아주니 저렇게 많은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의 입을 닫게 만든 것은 지난 세월 남편의 소홀함을 비난하고 질책했던 나였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나의 비난에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았고, 짜증을 내거나 입을 닫았다. 그 짜증은 다시 남편에 대한 나의 원망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악순환의 터널을 지나왔다.
이제는 선순환으로 돌아섰다. 남편이 책을 보는 모습에 내가 칭찬을 건넸고, 그 칭찬을 들은 남편은 더 열심히 책을 읽으며 이제 내 말 대부분을 수용한다. 내 말을 수용하는 남편에게 내가 까칠하게 말할 이유가 없다. 서로에게 부드러운 말이 오가기 시작하니, 남편이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딸은 아빠가 책을 읽으면서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책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고 했다. 내가 20년간 독서논술 수업을 하고, 거실이 책으로 도배되어 있을 때도 남편과 딸들은 강 건너 불 보듯 책을 손에 잡지 않았다. 마음을 닫고 있을 때는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책을 읽을수록 지난 삶에 대한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나에게도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지난 과오를 뉘우치는 사람에게 모질게 할 수 없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당신은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으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사람이 큰 자산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취미 생활 실컷 했으니 여한도 없겠네요.”
내 말이 그의 가슴에 얼마나 스며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남편은 다시 30대로 돌아간다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선택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는 늘 적성에 맞지 않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고 한다. 중의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남편이 이제야 비로소 그 '때'가 된 것일까. 성당 언니의 말처럼 나의 기도가 이제야 이루어진 것인지, 하느님의 뜻이 이제야 드러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예전에 출근길에 한숨 푹푹 쉬며 현관문을 나가던 사람이, 이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독서를 통해 자존감과 자신감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다. 온갖 취미 생활과 모임을 하며 술을 마실 때는 겉으로는 즐거워 보였을지 몰라도, 그의 내면은 많이 웅크려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달 두 딸은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것은 좋은 거구나. 나도 책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이번 가족 독서토론회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