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30년의 일상루틴을 단 몇 개월만에 변화시켜
두 달간의 연재 중단이었다. 지난 2월 1일 첫 글을 올린 후 4월 22일 잠시 멈추었고, 어제까지 꼬박 두 달을 쉬었다. 대상포진 등으로 심신이 저하되면서 일상의 루틴이 완전히 깨져버린 탓이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누군가 찾아와 글을 쓰라고 재촉했다.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한 염원을 꿈으로 빚어낸 모양이다. 심신의 힘이 평상 수준으로 회복된 지금, 남편의 변화와 우리 집의 새로운 풍경을 마지막 회에 담으며 이 연재를 마무리한다.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시작된 남편의 독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부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집에 소장된 책들을 읽는다. 고명환 작가의 책에 있던 추천 도서 목록을 건네받았을 때, 내가 일부러 너무 어려운 책들은 제외하고 꼭 읽었으면 하는 고전 몇 권을 추가로 빌려다 주기도 했다. 때로는 내용이 어려워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책도 있었지만, 아직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중심으로 골라주고 있다. 최근에는 꽤 두꺼운 《인간의 본성》을 읽었는데, 상당히 괜찮은 책이었다고 평했다. 독서 시간은 퇴근 후나 주말, 그리고 새벽 4시 30분이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덕분에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한다. 그렇게 남편은 매월 평균 15권 이상을 꾸준히 읽어냈다. 정작 나는 한두 권을 읽을까 말까 한 시간이었다.
남편은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확연히 넓어졌다. 예전에는 나를 오직 자신의 좁은 관점으로만 평가하고 판단했지만, 이제는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의 까칠한 부분 이면에 가려져 있던 성실함을 인정해주었고, 잦은 잔병치레를 하는 내게 연민의 감정도 내비쳤다.
집안일 참여도 확연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지못해 '도와주는'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일정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며 자발적으로 분담한다. 오늘 아침만 해도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은 후, 껌딱지 같은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재활용품까지 분리수거해서 버리고 왔다. 예전에는 남자가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며 꺼렸던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역시 남편의 루틴이 되었다. 아이들을 한창 키울 때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집안일 대부분을 내가 도맡아 했다. 남편이 퇴근 후나 주말에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주중에 전업주부로 시간적 여유가 많은데도, 오히려 남편의 집안일 분담도가 훨씬 높아졌다. 인고의 시간 뒤에 이런 편안한 세상도 오는구나 싶다.
대화의 양도 늘었다. 예전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책을 보면서 느끼는 점들을 한두 마디씩 건네는 편이다. 돌이켜보면 대화 없이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때는 나 역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급급하여 남편에게 집안일 참여를 요구하기 전에 혼자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간이었다.
남편은 이제서야 재테크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과거를 아쉬워한다. 이미 부동산이나 주식 등의 기회가 사라진 지금에서야 눈을 뜬 것에 대한 후회다. 내가 재테크를 위해 시내 신축 아파트를 사야 한다고 했을 때, "그거 올라봐야 얼마나 오른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신축을 포기하고 친환경 아파트를 샀는데, 신축은 그 때부터 3억이 올랐다. 그 때 얼마나 쓰라렸는지 모른다.) 그의 그런 반응에도 내가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던 데에는, 나의 건강 문제로 인한 경제력 불확실성, 그리고 남편이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소규모 대출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가슴 한편에는 아쉬움이 점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 노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재테크에 무관심했던 남편의 선택이 오히려 탁월했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른다. 당시 아파트를 선택한 기준은 '재테크를 위해 선호하지 않는 동네에 사는 것 보다, 재테크와 상관없더라도 ‘살고 싶은 곳에서 살자'는 것이었다. 지금 나의 기준에서 우리 동네만큼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자연을 품었고 공기청정지역이면서도 20분 거리에 지방 도시의 모든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사통팔달 교통망으로 대도시도 35분 거리다.
노년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 건강을 관리하며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누리는 삶이 너무 좋다.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도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술 담배와 함께 살아도 천수를 누리기도 한다. 생명은 신의 영역이고, 건강관리는 인간의 몫일 뿐이다.
남편은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들을 노트에 적고, 가끔씩 가족 단체 채팅방에 좋은 글귀를 올린다. 남편의 소소한 긍정적인 변화는 내가 그의 '빛'을 더 많이 보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그의 '그림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좋은 면에 눈길이 더 간다. 결혼 후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갖다 주었고, 정년 이후에도 일하기 위해 이직을 감행했으며, 무엇보다 몸이 건강하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내게 100% 자유를 주지만 그것은 아내에 대한 방임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남편에게 일장일단은 있을 것이다. 다만 어느정도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현재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이기에 브런치스토리나 지인들에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수많은 상흔들도 있다. 아직 완전히 승화가 된 것은 아니지만 글을 씀으로써 조금씩 지우개로 지워가는 느낌이다. 언뜻언뜻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출렁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남편의 그림자보다 빛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내 남편'을 온전하게 감싸주지 못했던 나의 부족함, 즉 '내 눈의 들보'가 이제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편 눈의 티끌만 보았을 때는 모든 문제가 남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지 못할 때 상대방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법이다.
사람의 그림자를 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그림자만 보게 된다. 하지만 빛을 보기 시작하니까 더 많은 빛이 보였고, 그 빛은 나를 밝게 비추고 다시 남편에게 반사되었다. 어느 누가 부족한 면이 없을까. 남편의 부족한 부분과 나의 부족한 부분이 이제는 서로에게 연민이 되어간다. 빛 뒤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림자가 있지만, 그 그림자는 어차피 빛과 공존한다. 빛을 사랑한다면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조차 함께 안고 가야 한다.
세모, 네모, 별 모양의 날 선 모서리들이 세월에 마모되고 닳았다. 사실 견뎌냈다기보다는 둘 다 결단력 부족으로 지금까지 시간이 흘러왔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부족함은 마름모꼴이 되어 그 모서리 부분조차 조금씩 뭉툭해져가고 있다. 돌고 돌아온 시간들 속에 독서라는 매개체로 남편과 마주 서 있다. 거실에는 이제 막 몸을 단련한 듯 탄탄한 몸의 낯선 남자가 독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