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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Sep 18. 2020

모스코우2

목이 말랐습니다.

다행히 데스크에는 한국사람들이 있더군요. 정말 어찌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전 바로 영어 문장을 적어둔 쪽지를 한 손으로 구겨 주머니에 처넣었습니다. 네, 이 표현이야말로 가장 적절합니다. 그냥 집어넣은 것도 아니고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주먹질을 하듯 구긴 쪽지를 처넣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여권을 보여주시겠어요?"

"아, 네 잠시만요..."


전 백팩 깊숙이 넣어둔 여권을 찾았습니다. 여권이야 말로 해외에서 제 신분을 증명할 유일한 물증 아닙니까? 더군다나 이게 없다면 해외에 나가는 것도, 더 큰 문제로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지 않습니까? 그때 저는 신용카드나 현금은 다 잃어버리든 도둑을 맞든 여권만은 절대 잃지 않으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 가방 깊숙한 곳에, 갖은 옷가지와 노트북, 책, 휴대폰 충전기 등등 사이에 숨겨두었습니다. 사실 제가 공항 리무진 안에서 잠에 못 든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혹시라도 여권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리무진 안에서 저는 남들 눈에 안 띄게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여권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됐습니다. 여권을 가장 안전하다고 싶은 방식으로 가방 안에 넣어뒀습니다. 그런데 제 등 뒤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는 한가운데서 그걸 헤집어 들춰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대한 그들 눈에 띄지 않게 여권을 찾으려 했는데 너무나 깊숙이 그리고 치밀하게 넣어 둔 터라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제 오른쪽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던 한 중년 남성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를 이어 이제 막 결혼을 했는지 아니면 그냥 연인 사이인지 한 커플이 왔습니다. 이어 제 왼쪽 데스크에 있던 4인 가족 - 그중 한 대여섯 살로 보인 남자애가 있었는데 계속 엄마한테 칭얼거리더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는군요 -도 자리를 떴고 이어 외국인 남성 한 명이 왔습니다. 제 주위에서 하나둘 수속을 마치고 떠나는 것을 보니 더욱 초조해졌습니다. 대기줄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는 거 같고, 두 차례 연잇던 재채기는 저를 향해 침을 뱉는 거 같았습니다. 


도저히 여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데스크에서 제 여권만 기다리고 있는 승무원 - 승무원이 맞나요? -의 눈에서도 점점 초점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제 안경이 뿌옇게 습기가 찰 정도였습니다. 저는 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모든 짐을 풀어헤쳤습니다. 마치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씻을 요량으로 가방 안 쪽 어딘가에 넣어둔 속옷을 찾아 헤집는 것처럼 다 끄집어냈습니다. 짐을 풀면 풀수록, 여권이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심장은 요동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도 미안함이지만 무엇보다 여권이 안 보인다는 초조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방 안 구석에 넣어둔 속옷만 남기고 짐을 다 꺼내고 나서야 제 여권이 보였습니다. 씨발.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 욕을 내뱉었던 게 생각나는군요. 


가까스로 찾은 여권을 건넸습니다. 그는 제 여권을 살펴보고 키보드를 몇 번 치더군요.


"짐을 여기 올려주시겠어요?"


그는 데스트 왼쪽에 놓인 컨베이어 벨트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그의 뒤로는 옆 데스크에서 처리된 가방이 덜크덕 거리려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의 순수한 컨베이어 벨트는 공항에서 처음 봤습니다. 어떤 면에서 무수한 러닝머신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거 같기도 했습니다. 탱크 수십대가 동시에 전진하는 것도 같더군요. 아무튼 저는 그의 말에 따라 제 짐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반도 채 안 찬듯한 캐리어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쏫아낸 백팩 안 짐들도 하나씩 올렸습니다. 사실 바로 백팩에 넣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여권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혀 바로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뿔싸 싶어 급하기 일일이 주워 올렸습니다. 노트북, 책, 휴대폰 충전기, 세면도구, 지갑...


"죄송한데... 그것들은 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황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하는 짓을 보며 난감한 듯 말했습니다. 그 사이 제 오른쪽에 있던 커플이 체크인을 마치고 자리를 뜨더군요. 


"저기... 짐을 올리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네, 그렇긴 한데요. 캐리어만 올리시면 됩니다. 백팩도 원래는 무게를 재긴 해야 하는데 어지간하면 그냥 넘기거든요.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하나 씩 올리실 필요는..."

"아, 저는 다 올려야 하는 줄 알고... 죄송합니다. 바로 정리할게요"


다시 안경에 습기가 차는 게 느껴지더군요. 정리라고 할 것도 없이 저는 개별적으로 따로 노는 짐들을 제 백팩에 구겨 넣었습니다. 이때는 이 표현이 정말 적절하네요. 정말이지 구겨 넣었습니다. 그 순간 너무나 씻고 싶었습니다. 


제 여권과 티켓을 돌려받는 것으로 공항 안에서의 첫 과정은 끝났습니다. 제 캐리어는 컨베이어 베르를 따라 달캉달캉 거리며 흘러갔습니다. 빈 깡콩이 요란하듯 반은 비어있는 캐리어 인지를 굉장히 달그락 거리더군요. 데스크의 그 직원은 마지막으로 캐리어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혹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이 근처에서 한 15분 정도 기다렸다 들어가라더군요. 혹시 방송이 나오면 안내에 따르면 되고 아무 말도 없으면 비행기를 타러 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데스크 바로 뒤 빈 의자를 찾아 앉았습니다. 벌서 땀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목이 너무나 말랐습니다. 백팩 안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데 그럴 힘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 옆에 편의점이 보였습니다. 패스포트 컨트롤이라고 하던가요? 수속 절차를 받으러 가는 1차선 복도 바로 앞에 편의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얗게 빛을 내는 공항보다 더욱 강렬한 조명으로 치장한 편의점이었습니다. 뭔가 비행기를 타기 직전, 사실상 한국 땅을 밟는 마지막 순간 - 엄밀히 따지면 면세점은 세금을 안 내는 공유지 같은 곳이니까요-을 강조하는 것만 같더군요. 찬 물을 사러 갔습니다. 목이 너무나 말랐습니다. 



2. 패스포트 컨트롤


한 20분쯤 기다렸습니다. 아무 방송도 없는 걸로 봐서는 제 짐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듯했습니다. 사실 든 것도 뭐 없으니 문제가 생길 여지 자체가 있을 리가 없었겠지요. 비행기 출발까지는 한 2시간가량 남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면세점에서 뭘 사려는 건 아니었지만 최대한 빨리 게이트로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거 같았습니다. 물론 면세점 윈도우쇼핑 정도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물건들을 얼마나 싸게 파는지 궁금하긴 했었거든요. 그때쯤인 걸로 기억합니다. 런던에 있는 제 친구가 면세점에서 담배를 사다 달라고 하더군요. 영국에서 담배는 너무나 비싸다면서요. 그 친구가 한국에 있을 때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흡연자들을 혐오하는 축에 속했지요. 그런 친구가 담배를 사달라고 해서 처음에 좀 놀랐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람이란 어느 순간에도 바뀌기 기도 하니까요. 마치 제가 어쩌다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있고, 여러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처럼 말이죠.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에, 생각하지도 못한 요인으로 사람은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니까요. 혼자 타지에서 공부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었겠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또 본토에서 직접 부딪히는 건 다르겠지, 뭐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정도로만 열린 공간 너머에는 무수히 많은 기계들이 있더군요. 그 광경이 너무 압도적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엑스레이 검사대가 수십 개는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 뒤로 일개미 뗴가 줄지어 가듯 사람들이 늘어서 있더군요. 무언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극비의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특수요원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신원은 깨끗해야 하고, 소지품에는 문제가 없어야 하고 - 그런데 방사능에 오염시키지요 - 그리고...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요. 각자가 무슨 생각을 품고, 어떤 목적으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같은 곳을 향합니다. 같은 비행기 안에 있는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한 곳으로 가지만 그곳에서부터 그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마치 적진에 침투하는 비밀요원처럼 각자의 임무를 갖고 움직이는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 중에 그 사람들을 보며 저 수많은 기계에서 뿜어져 나올 방사선에 노출된다 생각하니 께름칙하더군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물은 갖고 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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