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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저학년, 근간이 굵고 튼튼한 나무

입시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지금 뭘 하면 좋을까요?

by 표수

23. 기초가 튼튼한 아이는 갈수록 두드러집니다.


디자인과, 만화과, 회화과—이 세 전공의 이름만 들어도 미술 계열을 진로로 염두에 두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님들의 상상은 분주해집니다. 어떤 과 입시가 쉽다고 하고, 어떤 과는 취업이 어렵다고도 하며, 어떤 과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야 한다고들 합니다. 입시에 진입하고 나면 실기와 내신의 비율, 출제 유형, 포트폴리오의 방향성까지—이른 나이부터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아이들과 그 부모님은 수많은 정보를 찾아 헤매고, 입시 구조와 대학별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입시라는 세계는 매우 구체적이고 전략적이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진로가 구체화될수록, 전공별 맞춤형 실기 훈련이 필연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래서 입시 미술은 목적지 중심의 학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루트가 있고, 평가 기준이 있으며, 그것에 맞춰야만 하는 구체적인 '정답'들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구조를 부정적으로 보고, 교육부도 학생 평가에 대한 다양한 방향성을 시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목적이 중심의 학습이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입시 전 단계에 있는 아이들—특히 초등 저학년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미술 교육이 필요할까요?


아직 ‘입시’라는 단어조차 실감 나지 않는 이 시기의 교육은, 오히려 입시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목적지 중심 학습’은 이후에도 많이 하게 될 테니, 목적지 중심 학습에서 놓치기 쉬운 쪽을 함께 다루어내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학부모님들께서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해 막연함을 느끼십니다.

"아직 어려서 뭘 시켜야 할지 모르겠어요."

"입시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지금 뭘 하면 좋을까요?"

"그림은 좋아하지만, 그냥 재미로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어떤 전공을 택할지’가 아니라, ‘창작이란 무엇인지 처음 배우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초등 저학년 시기는, 말하자면 ‘토양을 고르고 뿌리를 내리는 시기’입니다. 입시 시기가 나무의 열매를 수확하는 때라면, 이 시기는 그 나무가 버틸 수 있는 근간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근간이 약하면, 어떤 전공을 택하든 결국 흔들리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비슷한 출발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기초가 튼튼한 아이는 갈수록 두드러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기초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연필을 잘 쓰는 것, 색을 예쁘게 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힘, 관찰하는 습관, 표현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각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미술의 근본 언어입니다. 특히 미술을 좋아라 하는 초등 저학년이라면 입시를 고민하는 고학년이 되기 전에, 우리 아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흔들리지 않을 ‘표현의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유연하고도 튼튼한 미술교육이 지금부터 준비되어야 합니다. 핵심은 입시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멀리 떨어진 시기에서, 가장 멀리까지 내다보는 미술 교육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이라는 것은 결코 입시나 진로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시각화하고, 감정을 전달하며, 세상을 자기 언어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자라나는 시간은 초등시기가 적기이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욕구가 먼저입니다: 생성형 AI의 진짜 순서


지금 우리는 놀라운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성형 AI는 과거의 디지털 도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단지 한 줄의 텍스트만 입력해도 정교한 이미지가 생성되고, 음악이 작곡되며, 시나 소설이 완성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물의 수준은 종종 인간의 창작 능력을 위협하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이들의 미술 교육 역시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디지털 드로잉은 이제 기본 능력처럼 여겨지고, 관련 기능을 빠르게 익히는 아이가 앞선 인재처럼 평가되기도 합니다. 일부 학부모들은 아이에게 태블릿을 사주며 “요즘은 손으로 그리는 시대가 아니에요”라고 말합니다. 아동미술에서도 “이젠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담론이 자주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하나의 위험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바로 ‘표현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생각만 잘하면 된다’는 인식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생성형 AI는 과연 왜 발전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기술적 장벽, 시간과 비용의 문제, 재능에 대한 열등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AI는 진보해 왔습니다. 즉, 생성형 AI의 출발점은 언제나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기술의 위치를 분명히 정리해야 합니다.


생성형 AI는 무조건적으로 표현을 대신해 주는 기술이 아니라, 표현의 욕구가 먼저 있고 그 욕구를 지원하는 도구로서 발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아이들에게 그 순서가 거꾸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표현해보고 싶어서 기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먼저 주어지고, 그에 따라 표현이 진행되는 방식입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교육 순서입니다.


기술은 편리합니다. 시간을 절약해 주고, 결과물의 완성도를 보장해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기술은 창작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왜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경험해보지 못한 채 자란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그려본 적 없는 창작자’가 되고 맙니다.


이는 창작자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드는 문제입니다. 표현은 단순한 도구 사용이 아닙니다. 한 줄 한 줄 그려가며 몰입하는 시간, 그림이 잘 안 될 때 좌절하고 다시 시도해 보는 반복, 자신이 표현한 것을 바라보며 생기는 자존감과 반성의 과정. 이 모든 것들이 모여야 비로소 ‘표현력’이 완성됩니다.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이 ‘표현의 본질’입니다. 아이들이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떠올리고, 그 생각을 스스로 시각화해 보며, 그리는 과정에서 몰입과 실패를 경험하게 하는 것.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손의 감각을 믿게 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미지를 바깥으로 꺼내는 표현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AI 기술은 그다음입니다.


기초가 단단한 아이는 어떤 도구를 만나더라도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표현의 의미를 알고, 창작의 흐름을 체화한 아이는 생성형 AI조차도 자신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표현의 순서는 언제나 인간의 욕구에서 출발하여, 훈련을 거쳐, 도구를 익히고, 기술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로, 아이를 창작자로 성장시키는 길입니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내용 :


우리는 아주 좁은 영역 안에서 겨우 해내는 창작자를 아마추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은 다양한 재료, 기법, 주제를 적재적소에 맞춰 자유롭게 선택하여 작업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할 줄 아는 것이 ‘AI에게 지시하는 법’밖에 없다면, 그 사람은 결국 AI라는 표현 수단 안에 갇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 AI는 이제 전공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일찍부터 미술에 흥미를 보인 아이들이 그 수단 하나만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요?




<AI시대, 미술 좋아하는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까?>

*급변하는 AI시대, 미술 전공자의 현직 전문가 다운 시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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