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도 기본기를 배울 수 있다면 배워야 하는 이유.
꿈의 크기를 재단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미술 문화를 향유하고,
그 안에 깊이 빠져 자신을 발견해 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미술은 겉으로 보기엔 잘 몰라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분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릴 적 부터 미술에 흥미를 느낀 아이들이라면, 미술이 얼마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지 꼭 제대로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미술계에 발을 들이려는 예비 화가들이라면 더더욱, 그리는 방법만큼이나 그림 속에서 즐기는 법,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까지 가랑비처럼 스며들게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비록 제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이곳이 대도시도, 신도시도, 교육열이 뜨거운 지역도 아닐지라도요.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던 도시는 예부터 지방으로부터 출발한 경우가 많았으며,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를 떠올리면 아를,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를 떠올리면 지베르니와 같은 지방 소도시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실제 많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꼭 예술이 큰 도시에서만 역사를 쓰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배워나가기에는, 지금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 작은 도시도 참 괜찮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미술 선생님으로서, 이 작은 동네의 꿈나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고 있지요. 이곳에서도, 불멸의 반 고흐들이 자기만의 꿈을 품고 자라납니다.
기본기의 부족은 감출래야 감출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돕기 위해 제가 처음으로 설정한 교육의 방향은 ‘미술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미술사를 즐기면 답이 나온다!』 챕터를 참고해 주세요.)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두 번째 방향은 무엇일까요?
바로 ‘제대로 된 뿌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뿌리’란, 미술의 기본기를 뜻합니다. 이 기본기는 관찰력, 표현력, 창의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이 모든 능력에 영향을 주는 핵심 요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 연습, 명암의 이해와 표현, 색채 감각, 비례와 구도, 재료의 이해와 활용 등에서 시작되는 것들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본기를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고, 성실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AI 시대’와 ‘미래 교육’이 화두가 된 요즘, 왜 저는 여전히 손으로 그리는 기본기를 이토록 강조하는 걸까요?
아래는 그런 제 마음을 담아 학부모님들께 드린 편지글 이미지입니다.
저는 기본 없는 창의는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전공자들이 많을 겁니다.
훗날 우리 아이들이 자기의 창의성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가 오만하고 기반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쟁력 있는 창의성은, 내가 못하는 것에 대해
남을 깎아 내리려는 가벼운 행동에서 나오지 않고,
묵직하게 쌓인 실행의 시간으로 부터 비롯됩니다.
기본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시간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지치지 않게, 가장 즐거운 수업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띵킹아트 원장 드림
이 글에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저는 “누군가가 오만하고 기반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 속에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요즘처럼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디지털 드로잉 도구들이 극도로 편리해진 시대에는 자신의 실력을 숨기려 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습니다. 못하는 부분은 애써 그리지 않거나, 디지털 도구의 도움으로 손쉽게 처리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AI가 발전하기 훨씬 이전에도, 미술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기법들을 모방해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표현이라는 이름 아래, 본질적인 실력보다 연출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모두에게 감출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 약한 부분을 남들에게는 숨길 수 있었어도, 결국 저 자신에게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제 부족함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저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어떤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 때면, 언제나 마음 한켠에 따라붙는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뒤늦게 그 공백을 채워가려다 보니 시간도 훨씬 많이 들었고, 문득 “어릴 때 나는 이런거 안배우고 뭐했나.”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릴때 말이 나오니 말이죠, 그 시절의 저는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쉬운 것을 즐기는 것이 좋았던 천상 어린이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미술을 그저 사랑하는 어린아이로 성장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훗날,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그때 나는 왜 이런 걸 배우지 않았을까”라는 후회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저를 위해 ‘그리는 방법’을 떠먹여 주듯 부단히 가르쳐 주시려 애쓰셨던 선생님들에 대한 감사함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학원 선생님부터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까지, 제가 필요성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제 흥미에 날개를 달아주듯 하나하나 미술을 가르쳐주셨던 스승님들 말이지요.
물론 모든 선생님이 그런 분들이셨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네다섯 살 무렵부터 줄곧 미술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중에는 ‘내가 저 선생님께는 정말 배운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기억하기에, 저는 종종 ‘아이들 기억 속에 좋은 스승으로 남고싶다.’라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아이들에게 ‘기본기’를 탄탄히 가르쳐 주고 싶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 커서도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배워도 늦지 않다”는 말도 물론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기본기’를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는 바로 아동기에서 청소년기입니다.
미술의 기본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이 시기야말로 손끝의 감각이 유연하고 발달 가능성이 크며, 미술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고, 타 과목의 학습 부담도 아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은, 예체능 교육이 비교적 허락된 유-초-중등 시기의 황금같은 기회입니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평생을 그림과 함께 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단단한 기초를 쌓을 기회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소중한 시기를 ‘놀이처럼 흘러가는 미술 수업’만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속에서도 단단한 성장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조금은 높은 학구열을 가진 미술 선생님이 되고자 합니다.
잘 다져진 기본기 위에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진짜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로서 고뇌하고 탐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미술 '보육'이나 '놀이'가 아닌 '교육'의 목적 아니겠습니까.
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진짜 그리는 힘은 더 소중해집니다
이러한 제 생각에 더 큰 불을 붙이게 된 계기는, 바로 마법 같은 기술이 일상화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AI’의 급격한 발전이었습니다. AI 기술이 눈부시게 진보하면서, 인간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직업’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기회는 현저히 감소하고 있지요.
꼭 텍스트 프롬프트를 이용해 이미지를 생성하는 AI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종 페인팅 앱과 이미지 제작 툴은 인간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사람의 손길 없이도 섬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림’에 대한 진입장벽이 매우 낮아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그림을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진입장벽은 낮아졌을지 몰라도, ‘스스로의 손으로 그리는 것’ 즉 능동적인 창작에 대한 진입장벽은 오히려 더 높아졌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림을 직접 그릴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고 자라게 됩니다. 그 결과, ‘스스로 그리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는 아이들의 수도 줄어들게 되지요.
이대로라면 ‘화가’를 꿈꾸는 아이들은 점점 드물어지고, 그림 그리기는 점차 ‘교양’의 한 분야로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특정 계층이 향유하는 문화처럼, 점점 멀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술이라는 교양은 성인이 되어서 익히기에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미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황금 같은 어린 시절을 ‘미술’에 투자하기로 한 우리 아이들에게, 그저 잠시 즐거운 놀이처럼 흘러가는 수업이 아니라, 진짜 미술—그리고 그 위에 튼튼한 뿌리를 내려줄 수 있는 기본기 중심의 미술 교육을 전해줘야겠다고 말입니다.
* 잠깐, 현 시대에서의 기본기는 과거 유럽 아카데미 미술에서 말하는 창의성은 무시되고 기술적인 기본기만을 추구하는 미술의 기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거기에 더해 '창의성'을 키우는 미술도 미술의 기본기로 보고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멸의 화가 반고흐
여담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화가 반 고흐의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보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 고흐는 유년 시절부터 화가를 꿈꾸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청년이 된 이후, 뒤늦게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의 반 고흐는, 그림을 썩 잘 그리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주변으로부터 수많은 지적을 받았습니다. 더 나은 표현을 하기 위해, 반 고흐는 수없이 습작을 거듭하며 노력합니다. 다양한 화풍을 연습하고, 명암을 공부하고, 인체의 비례를 익히기 위해 스퀘어링 기법 등을 활용하며 꾸준히 훈련했지요.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기본기의 부족으로 인해 자유로운 표현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해했고, 그때마다 백조가 물 아래에서 쉼 없이 발장구치듯 눈에 보이지 않는 기본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올린 노력은 점차 반 고흐에게 ‘뿌리’가 되었고, 그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화풍을 익히며 점차 자신만의 색채를 발견해 나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를 떠올리며, 기본기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그린 작가라고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아카데믹한 제도 아래에서 철저히 훈련받은 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화가이지만, 자신의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기본기를 다지며 자신에게 떳떳한 작품을 남기고자 노력했던 예술가였습니다.
이런 반 고흐의 눈물겨운 이야기 덕분에, 저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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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이들의 미술 교육관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의 예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선구자이자, 모두에게 비교적 친숙한 이름—파블로 피카소입니다.
피카소의 생애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였지만, 그의 삶은 기초적인 규칙을 충분히 익힌 후에야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보여줍니다.
피카소 (Pablo Picasso)
"Learn the rules like a pro, so you can break them like an artist."
(번역: 규칙을 전문가처럼 배우고, 예술가처럼 그것을 깨라.)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신동으로 불리며, 미술의 기본기에 충실한 작품을 꾸준히 그려왔습니다. 이후 아카데믹한 그림의 정점에 이르러서야, 그는 회화 표현의 전통적인 원칙인 단일 시점의 원근법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입체파(큐비즘)라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합니다.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우는 여인》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이 모두 그와 같은 화풍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양한 시기마다 서로 다른 표현 양식을 시도했으며, 정점에 오른 자만이 시도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가적 실험들을 해낸 인물이었습니다.
현대미술은 그 특성상 절대 하나의 기준으로 획일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술사를 공부할수록, 우리가 작가나 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가장 먼저 어떤 기준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인으로서, 그 기준은 결국 창작의 깊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이미지가 손쉽게 생성되는 이 AI시대가 점점 더 고도화될수록, 우리의 일상이 될 수록, 우리 아이들이 깊이 없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깊이 있는 작품을 창작할 줄 아는 사람들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깊이를 바탕으로, 언제든 다양한 시도를 막힘없이 펼칠 수 있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배울 수 있는데 배우지 않고 현대미술을 핑계삼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통하지 않습니다
*급변하는 AI시대, 미술 전공자의 현직 전문가 다운 시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