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으려다 누나가 되었다.
남아있는 사진에 의존하지 않은 온전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4살이었나, 5살의 기억 정도가 남아있는 처음의 기억인 것 같다. 나는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길러지며 대개는 예쁨을 받았다. 시골 웅변 학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는데 10칸 남짓한 계단조차 원장님에게 안겨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유치원을 마친 대부분의 시간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했다. 술 마시길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은은한 알코올 향도, 파고들면 공격하는 따가운 턱수염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할아버지는 엄연히 그 시절 나를 가장 귀여워 해준 사람이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은근히 귀찮아하는 기운을 풍기면서도 언제나 나를 곁에 끼고 다녔다. 개구리 뒷다리, 토끼 고기도 먹여주고, 강아지 풀, 딸기도 따주며 나를 키웠다.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다 시계의 짧은바늘이 6을 가리킬 때면 할머니가 정확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머니는 꼭두새벽부터 밭일을 종일하다 온몸에 밴 흙과 땀 냄새를 풍기면서도 씻기는 커녕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언제나 내 배가 곯을까 걱정하는 사람 같이 구셨다. 반찬 투정을 하면 밥에 물이라도 말아서, 김이라도 싸서 먹이고는 했고, 잠투정에 짜파게티를 끓여내라고 하면 밤 11시라도 씻은 김치와 함께 내오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할머니가 밥에 손으로 찢어준 김치를 올려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매워도 괜찮고, 입 안에 할머니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누구는 가려 먹는 오이, 콩, 두부를 좋아하는 내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예쁜 한복을 입고 친척 언니 오빠들을 한 번에 만나는 게 좋았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마지막에 도착하는 우리 가족을 환영하며 달려 나와 안아주고 예뻐해 주었다. 지금 이 순간 지금도 가끔씩 차오르는 나의 알 수 없는 도끼병의 원인을 찾았다. 그 시절 주인공은 내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나는 존재로 사랑받고 귀여움 받는 존재였다.
6살이 되고 새로운 미술 유치원에서 또래의 친구들과 지내게 되며, 처음으로 선생님의 귀여움은 모두가 나눠가져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쯤에 양보하는 것이 착한 거라는 더한 진리도 깨달았을테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친구들이 나와 있었던 일들을 친언니에게 이르고, 잘 놀다가도 저녁에는 친오빠에게 홀랑 가버리는 경험도 해야하는 심심하고 외로운 마음이 짙어진 흔한 외동의 어린이의 기억들이 난다. 이제쯤 배경이 엄마 아빠에게 위로 받는 우리 집이 되면 좋으련만 건너뛰어 6살 터울의 남동생이 태어난 날의 기억에 머문다. 동생이 할아버지의 생일에 태어났기에 이번에도 배경은 모든 친척이 모여있는 할아버지의 집이다. 그 아침, 눈을 떴을 때 방 가득히 깔린 이불속 엄마 아빠는 없고, 놀란 내게 사람들이 엄마가 동생을 낳으러 간 거라고 설명했다. 이제 그다음 기억은 병원. 동생은 정말 빨갛고 못생겼었는데 동생을 못생겼다고 말하는 친척들이 싫었던 걸 보면 그 핏덩이에 놀란 마음은 착한 누나가 되고 싶은 마음 뒤에 금새 주춤했다. 아마 나는 타고난 누나가 아니었을까? 불행하게도 그건 지금도 가끔 상상하는 나의 완벽한 환상일 뿐이다.
나이 30이 되어 엄마에게 전해 들었으나, 단 한 조각도 기억나지 않는 ‘매일 밤 동생을 낳아달라고 기도를 한 나’의 퍼포먼스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타고난 누나가 아닌 나에게 엄마의 나 때문에 동생을 낳았다는 그 말이 나를 얼마나 무겁게 하는 말인지, 엄마는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린이는 부족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 동생을 원했던 것이다. 되려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일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동생이 태어난 이후 비로소 엄마와 집에 있는 시간이 생겼다. 엄밀히 따지자면 동생과 셋의 시간이다. 그 시간 속 기대처럼 동생의 머리를 꾸며주거나 소꿉놀이를 할 수는 없었지만 미워할 이유 역시 없었다. 누워만 있는 동생의 얼굴은 점점 귀여워졌고, 있는 그대로 예뻐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나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을 하며 점차 누나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누나가 되어갈 때 그 집의 엄마와 아빠는 항상 지쳐 있었다. 엄마는 뭐든지 화냈고, 아빠는 뭐든지 말하지 않는 듯했다. 그날은 어떤 이유였을까? 엄마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목욕을 하던 동생을 화장실에 두고 아빠에게 달려가 죽일 듯이 화를 냈다. 또 아빠는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내 방에 쏙 하고 들어가 문을 쾅하고 닫고 잠가 버렸다. 엄마는 기어코 아빠를 끄집어냈고, 곤란해 눈치만 보던 나는 화장실에 있는 동생에게 가 귀를 막아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괜찮아 괜찮아” 동생에게 말해주며 나는 또 한 번 누나가 되었다. 그 일로 나에게는 누구도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동생에게 말하면서 들었던 게 다였다.
당연히 내가 집에서 늘 웃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TV프로그램 요정 컴미가 재밌었고, 동생의 지독한 똥 냄새가 웃겼으며, 친척언니가 놀러 와 함께 방학 숙제를 하는 것도 재밌었다. 아, 유치원에서 산타 할아버지가 왔을 때도 좋았다. 이런 이야기들로 조잘조잘 떠들다 대화가 없는 집안을 채우는 수다쟁이 7살이 되어 있었다. 말이 느린 동생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고, 먼저 다가가는 쪽은 나여야만 했다. 그래도 웃고, 궁금해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면 바쁜 엄마 아빠가 한 번씩 나를 봐주었다. 조용한 존재는 너무 금방 잊히니까, 구태여 시끄러워 피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가 있는 자리가 조금은 채워져 덜 서늘했으면 좋겠다고 혼자 바랐다. 내가 원했듯 말로라도 채우는 것이 유일한 방식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