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나를 감싸는 계절이 왔다. 코로나로 재택근무하는 날이 늘었고, 밖에 나가기보단 집에 머무르는 날이 많아진 올 가을. 볕이 잘 드는 거실에 가만,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괜스레 마음도 들뜨고 설레는 마음까지 든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 언제부턴가 밖보단 집이 좋아지면서 지박령처럼 침대 혹은 소파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집에 머물렀을게 분명하지만 그냥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자. 그러다 얼마 전 연속 3일을 재택근무로 밖에 나가질 않으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사람이 밖에 나가서 몸을 움직이고 햇빛을 받으며 얻는 힘도 분명 있을 텐데, 집에 가만 앉아 하루 종일 컴퓨터만 들여보다 저녁이 되면 잠이 들고일어나면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 도돌이표 생활을 하다 보니 몸은 편하지만 조금은 무기력해졌다.
그러다 어제, 토요일 아침, 눈이 조금 일찍 떠져서 거실로 나왔다. 새벽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더니 아침이 되니 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았다. 햇살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에 또 내 마음은 설레고 말았다. 근래에는 한 번도 스스로 산책을 가야겠다, 마음먹은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꼭 산책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의 주말이었으면 다시 침대로 돌아가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잠이 들었겠지만, 어제는 씩씩하게 몸을 일으켰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의식 중 하나인, 우리 집 귀염둥이 코코에게 식사와 함께 물을 챙겨주었다. 그러곤 곧장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다 보면 비로소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한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늘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지만, 미세하게 그 온도 감은 다르다. 진짜 가을이 성큼 다가왔구나 싶다.
산책하며 바라보는 가을날의 왕송호수
코코를 데리고 집 앞에 있는 왕송호수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기 위해 집을 나섰다. 길가엔 예쁜 들꽃들이 알록달록 예쁘게 폈다. 하늘은 투명하게 맑았다. 우리는 따뜻하게 내리는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공원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엉덩이를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며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이따금 뒤 돌아보는, 쫄래쫄래 걷는 코코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렇게 우리 둘은 긴 여정을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출발해 호수공원 한 바퀴를 완주하고 돌아오면 약 두 시간가량 소요되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이 공원을 걸을 땐 어떤 코스인지 잘 몰랐기에 도착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는데, 몇 번 가다 보니 생각보다 긴 코스에 어느새 그 길을 즐기기보다 집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나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날이 많아지면서부턴 산책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이 길을 걸으니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부서지는 푸른 호수를 바라보며 걸으니 알 수 없는 여러 상념들이 머리를 스쳤다. 가을은 그런 걸까. 예전 그 어느 날 내가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때의 나와 나를 감싸던 그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의 분위기와 감정까지. 그런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계절의 바람이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당시 내게 벚꽃처럼 흝날리며 다가왔던 것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내 인생의 알록달록 단풍 같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나는 나이에 크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럴 땐 내가 이젠 나이를 조금 먹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올 한 해, 그리고 서른을 코 앞에 남겨둔 지금. 내 모든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카페에서 바라본 가을 왕송 호수 전경
이런 마음이 드는 내가 조금은 어색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졌기에 살았는데 여기까지 왔다. 내가 왜 존재해야 하고, 왜 이 힘든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수많은 날들. 때론 사람에 상처 받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홀로 깊은 터널 속을 헤매었던 날들. 이 기분과 마음으로 앞으로 내가 살아온 시간의 두배 이상을 더 겪어내야 한다는 고통이 무서웠던 날들. 그 모든 걸 겪어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서있다. 그런 마음과 시간을 겪었음이 무색하게 나는 또 바보같이, 아니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지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이 가을바람에 또 한 번 설레고 있다. 그냥 나를 향하고 있는 이 햇살과 바람이 그저 좋았다.
사는 게 그런 건가 보다. 어렸을 땐 하루하루가 놀랍고 즐거운 일로만 가득한 줄 알았다. 아니, 내 미래는 분명 항상 늘 스펙터클한 일들로 가득 차있고 아주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대했다. 분명 그럴 거라고.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냥 나는 하루하루 살다 보니, 하루하루 겪어내다 보니 어린 나에서 자연스럽게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인생은 특별한 일들로 가득 찬 게 아니라 아주 평범한 하루. 기분 나쁜 일도 있고 우울한 일도 있고 화나는 날도 있는. 그렇지만 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무색할 만큼 설레고 웃음 지어지는 행복한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런 작고 소소한 감정들을 겪고 또 떠나보내면서 지금의 나로 존재하는 거라고.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가 서있는 이 곳에서, 가을바람을 오롯이 느끼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