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1975)을 읽고
일 년 전쯤인가, 유튜브에서 안락사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본 적이 있다. 영상 속 불치병 환자는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소중한 이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이윽고 안락사 단체 사람이 약을 가지고 들어오고, 환자는 스스로 약을 먹은 후 초콜릿을 먹고 친구의 손을 잡고 잠들 듯이 생을 마감했다. 나는 죽음에 관하여 생각해본 적은 몇 번 없으나 그 영상을 보며 저것이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기 앞의 생(1975) 속 모모의 말을 빌리자면 빌어먹을 생(生)이 나를 망쳐버리기 전에 먼저 떠난 것이다.
소설은 잃을 것이 생 밖에 남아있지 않은 자가 바라본 생을 이야기한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절대 엉덩이로 벌어먹는 생을 살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모모는 생에게 엉덩이를 빼앗겨 버렸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요, 어떤 고통은 그저 고통이다. 버려진 이민자의 자식은 프랑스의 빈민가에서 고아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의 어미는 창녀였고 포주였던 아비는 어미를 죽였는데 그는 14년이 지나 찾아와선 있는 그대로의 모모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며 죽어버린다. 생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에도 모자라 그를 점점 내쫓으려 한다. 부모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모모는 그래도 네 살을 더 먹게 된 사실에 기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잡아먹는 죽음에 가까워진 것이기도 하다.
이런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의 말처럼 부모의 이름보다 위조문서의 생일이 더 중요하다. 모모는 서커스의 인형처럼 누구와도 닮지 못했지만, 그가 유달리 특별한 것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이다. 모모는 비극 속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강요받은 선택일지라도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앞서 모모에게 남은 것은 생 밖에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모모의 목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생 그를 길러준 못생긴 로자 아줌마의 생도, 같은 처지에 다른 삶을 사는 이웃들의 생도 모모가 가진 유일한 것들이다. 비록 이름 모를 미신에 비롯된 춤을 추는 것이나 우스꽝스러운 체조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러한 관계야말로 모모를 이루는 본질이며 그가 빌어먹을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다.
모모의 두서없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흘러가는 생과는 구분되는 무언가로 우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어렴풋이 생각해보았다. 물리적 법칙이기도 하고 생물적 속성이기도 하며 사회의 한계이기도 한 생 앞에 우리는 종속되어있다. 하지만 ‘자기’라는 이름으로 어렴풋하게나마 분리되어 있는 우리는 삶의 부조리 앞에서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구속되는 것이 지긋지긋한 로자 아줌마는 살아있기를 강요하는 생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대인 소굴로 돌아가 죽는다. 모모는 죽은 시체에 향수를 뿌리고 화장품을 바르며 어렸을 때처럼 방에 똥을 싸질렀던 것처럼 생의 폭정에 격렬히 저항한다. 생은 아줌마의 젊음과 목숨을 앗아갔을지언정 모모에게서 아줌마를 가져갈 수 없었다.
생 앞에서 ‘자기’라는 이름으로 서있는 모모와 로자 아줌마 그리고 모두를 바라보며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만든다.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할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묻는다. 세상은 다양한 화자의 입을 빌려 모모에게 종교가 필요하다, 종족이 필요하다 말을 하는데 그것은 공통적으로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모모에게는 롤라 아줌마처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든 나딘 아줌마처럼 이질적인 환경의 사람이든 자신의 생을 공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무관심하고 종래에 피조물을 잡아먹는 생을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자기와 생에 대해 입을 여는 순간 생각이 정리되고 이유 모를 힘이 솟는 것을 우리는 느껴보지 않았던가?
생을 산다는 것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일이다. 젊고 강할 때에 계단은 세상과 우리를 잇고 내일을 기약하는 곳이지만 약하고 혼자일 때 생은 우리를 모질게 괴롭힌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숨은 가파르다. 로자 아줌마는 자신이 어둡고 냄새나는 계단 층계에서 죽을 것이라고 울상을 짓곤 했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을 사랑했고 그가 사랑한 모모도 그를 사랑했기에 ‘자기’의 마지막 순간을 생에게 뺏기지 않았다. 자연의 법칙을 온몸으로 거부한 모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마친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p. 356)
에밀 아자르. (1975). 자기 앞의 생. 파주: 문학동네. 용경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