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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저 Jan 08. 2019

신부도 앞에서 하객 맞는 게 어때서

“결혼식 날 이 드레스 입고 뜀박질도 할 수 있나요?”    

장소는 드레스 숍. 이 대사의 주인공은 장차 나의 신랑 될 위인이었다.    

    

3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앞둔 우리는 작은 식당이나 카페를 빌려 맛있는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만으로 결혼식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어색한 것을 워낙 싫어하기도 했고,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듯이 공장에서 찍어내는 식의 결혼식에 거부감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 구상은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조금씩 어긋났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양가 부모님들의 기세에 한 발짝 물러서면서 당장 장소부터 바꿔야 했다. 그렇게 정해진 결혼식장은 시부모님이 다니시는 서울의 한 대형교회였다.     

남편은 “3.1절에 태어난 애국자답게 8.15 광복절에 결혼식을 하고 독립문에 집을 얻고 싶어!”라고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허무맹랑한 아이디어였지만,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러자고 동의했다. 결국 광복절에 교회 부흥회가 있어서 한 주 뒤에 결혼식을 올렸고, 독립문 근처 아파트가 우리 예산에 비해 턱도 없어서 그보다 몇 정거장 외곽으로 후퇴해야 했지만 말이다.        

상견례는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했다. 시댁은 서울이었고, 우리 집은 광주. 그 두 도시의 중간이 대전이란 게 이유였다. 여행하는 셈 치라는 아들딸의 설득에 양가 부모님은 “준비~ 탕!”총성과 함께 동시에 달리는 것처럼 같은 시간 출발해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하셨다. 결승선은 인터넷 블로그에서 보고 정한 대전 유성구의 한 중식당. 막판에 주최 측인 우리에게 귀띔도 하지 않고 지배인이 불쑥 들어와 장미꽃 두 송이를 주고 예비 장모 & 예비 사위, 예비 시아버지 & 예비 며느리의 포옹을 시키는 깜짝 이벤트(놀란 티를 감추느라 힘들었다)를 한 덕분인지 몰라도 상견례는 별 탈 없이 마쳤다.      

     

결혼식을 앞두고 1㎏도 빠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역시 예비신부라 예뻐졌다는 말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건넸다.   

“결혼한다더니… 어쩐지 이뻐졌다!”  

“저요? 그대론데요?”

“아냐, 확실히 살 빠졌어!”

  

혼수 준비하느라 신경 쓸 일이 많아 저절로 살이 빠진다고들 하던데 나는 예외였다. 될 건 되겠지 하는 느긋한 신부였다. 결혼 준비하면 피 터지게 싸운다는 주변의 노스트라다무스식 예언이 무색하게 우리는 혼수며 집 문제를 놓고 사이좋게 부담을 나누어졌다. (이 예언가들은 결혼 초기에 평생 싸울 걸 몰아 싸운다는 2차 예언을 내놓았고, 나중엔 애를 낳아야 싸운다는 3차 예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싸우길 바라는 건지도?) 우리 사회의 대충주의는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 하지만 결혼 과정에 있어 대충주의는 많은 것들을 별 일이 아닌 것으로 만들며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하여 예물 패스. 예단 패스. 스튜디오 촬영 패스. 화환 패스. 폐백 패스. 웬만하면 다 패스.                   


결혼식 날 신부는 아름다운 조명과 화사한 배경에 둘러싸여 하객들을 맞이한다. 계속 웃느라 볼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 헬퍼 이모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나는 그런 게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래서 정했다. 우린 함께 하객을 맞이하자. 그러려면 일단 결혼식 날뛸 수 있을 정도로(뛸 일이 있겠냐만은)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자! 그러다 보니 드레스 숍에서‘제자리 앉았다 일어섰다’를 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결국 우리는 웨딩숍이 아닌 파티웨어 숍에서 흰색의 긴 원피스 스타일 드레스를 빌렸다. 치맛자락이 바닥에 안 닿고 무료로 대여해준 흰 면사포도 댕강 짧아 딱 마음에 들었다.   

결혼식 당일, 식 시작 2시간 전 교회에 도착했다. 하루 전날 미리 받아온 드레스를 입고 혼자 신부대기실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전화로 예약했던 포토그래퍼가 도착해서 나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신부님은 언제 오세요?”

음, 아무래도 이건 조금 당황스럽다.  

“전데요!”

     

더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진다. 나름 메이크업도 받고, 그래도 거금 주고 의상을 빌려 입었는데, 쩝. 멋쩍은 기분도 잠시, 하객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하자 나는 신랑과 함께 교회 입구로 나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하객을 맞았다. 때로는 각자의 부모님 곁으로 가 친지에게 인사를 했다. 여기저기 어울려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어떤 하객은 “이렇게 많이 웃고 활발하게(방정맞게) 돌아다니는 신부는 생전 처음 봤다”라고 핀잔주며 얼른 신부대기실로 돌아가라 내 옆구리를 쿡 찌르기도 했다.                    

결혼식 전부터 휘젓고 돌아다닌지라 정작 결혼식 때는 졸도할 지경까지 피곤했다. 여기에 목사님의 주례사가 40분 넘게 이어지면서 높은 구두를 신은 나의 다리는 후들후들거렸다. 넓게 퍼진 드레스가 아니어서 신부가 흔들리는 게 혼주석에서 고스란히 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양가 부모님들은 내가 넘어지면 뭐부터 할지 2인조로 합을 짜면서 내내 불안에 떠셨다고 한다.   

예상 못한 상황은 식 후에도 왔다. 애초에 부케 던지는 세리머니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 눈치 없는(신부에게 신부 어딨냐고 물어본) 포토그래퍼가 그건 꼭 해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하객들을 줄줄이 세워놓은 앞에서 포토그래퍼와 말다툼 문턱까지 갔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짓고 어금니를 깨물며 복화술에 가깝게 말했다.  

“안 한다고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이 분 입장에선 이대로 가다가는 웨딩앨범 페이지를 다 못 채우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도통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결혼을 한 달 앞둔 친구 영선이가 부케를 받겠다고 자원에 나서면서 신경전은 일단락됐지만, 그 모습을 본 신랑 지인들은 남편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너, 앞으로 힘들겠다.” 등을 두들기면서.   

         

3년이 지난 결혼기념일(우리는 결혼기념일만은 8.15 광복절로 정했다)에 남편에게 물었다.

“다시 결혼식을 하면 어떻게 하고 싶어?”    

“결혼식은 아예 안 할 거야. 넌?”

“나도지!”  

이번 생에 웬만하면 결혼은 한 번뿐이면 좋겠다. 만약 나중에 은혼식이라도 하게 된다면 높은 구두는 안 신고, 날 잘 모르는 포토그래퍼도 안 부를 거야. 우리의 인생 모토는 결혼식 이후 더 확고해졌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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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이 포함된 에세이는 《오늘도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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