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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Feb 14. 2021

손목의 흔적보다 마음이 더 쓰라렸던 밤

친구가 건네 준 두유의 온기




스물, 그날 밤은 내게 선명하다. 어떤 이유로 언성을 높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가족과 다투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견디기 힘들었다. 평소엔 집에서 말과 마음이 쨍하게 부딪혀도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혔지만, 그날은 그러지 못했다. 또다시 손목에 칼을 댔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아빠마저 내 손목에 남은 흔적을 봐버렸다. 아빠가 울었다.  



좌절감과 죄책감에 점철된 채 그대로 검은 모자를 뒤집어썼다. 집에서 입는 반팔티 위에 대충 갈색 니트 한 장을 걸쳤다. 검은색 고무줄 바지에 다리를 구겨 넣고 집을 나섰다. 챙긴 건 휴대전화 하나.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며 곧장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이었다. 울며불며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잠시만! 전화 끊지 말아 봐! 바로 나갈게.”    



전화 너머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는지 부스럭거렸다. 그날은 11월이었다. 눈물 젖은 갈색 니트 사이로 바람이 ‘휑-’하고 관통했다. 종종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그땐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주황색 가로등과 선득한 공기. 손목에 남은 흔적과 그보다도 더 쓰라렸던 마음. 절뚝거리는 다리. 불과 전날에 교통사고를 당했기에 온몸이 삐걱거렸다. 눈물은 도통 멈추지 않았다. 분명 눈썹 주위가 심히 붉어졌을 거다. 두 눈이 무거웠다. 온 거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고장 난 다리가 다다른 곳은 내가 졸업했던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뒤에 나있는 딱딱한 나무 계단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얼마 안 가 친구가 도착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다만 계속 울었던 건 기억난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울어보기란 처음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한참 하던 중 어둠을 뚫고 익숙한 형체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같은 동네에 사는 또 다른 친구 J였다. 순간 울음이 그쳤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알고 보니 전화를 받은 친구 E가 J에게 따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제대로 상황도 모르는 채 나온 J의 표정은 영문 모름이 역력했다. 그런 J의 두 손에는 두유가 들려있었다.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건네받은 두유는 차가운 공기 속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따뜻함에 마음이 한결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마음은 크게 쓰라리지 않았다. 대신 슬슬 손목의 쓰라림이 와 닿기 시작했다. 울음이 그쳤다.    



“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게 불효 아니면 뭐냐고.”    



그렇게 한참을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파트의 어두운 계단 위에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그러다 몸을 일으켜 복도에 나 있는 오래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검은 물감을 칠해놓은 듯 까맸다. 대신 그만큼 하얗게 떠 있는 별들이 눈에 띄었다. 울면서 집을 뛰쳐나와 거리를 걸을 땐 안 보였던 별들이었다. 슬픔에 겨울 땐 저렇게 예쁜 것들도 담을 공간이 없구나. 한동안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들어가자.’    



각오를 한 채 들어간 집안은 불이 꺼져 어둡고 적막했다. 모두가 잠에든 후였다. 조용히 방에 들어와 침대에 차가워진 몸을 눕혔다. 손목에 흔적을 남겼던 커터 칼은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여전히 쓰라림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손과 마음엔 여전히 두유의 온기가 남아있었으니까.    



드라마 <멜로가 체질>


그날, 친구 E와 J에게 쑥스러워 차마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악몽으로 남을 뻔했던 그 밤에 곁에 있어 줘서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했다고, 덕분에 숱한 밤을 견딜 수 있었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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