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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 Juha Sep 16. 2021

마라케시의 밤

  국내든 해외든 새로운 도시를 가면 빠뜨리지 않고 가는 곳이 재래시장이다.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은 좁은 거리에 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주스로 갈아주는 알록달록한 과일도 한가득 쌓여 있는 곳이다. (중략) 터키의 파묵칼레를 여행했을 때에는 숙소 앞에 펼쳐진 마을 시장에서 알이 굵은 터키 체리를 한 봉지 사서 일행 넷이서 걸어가며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우리는 이미 여행자다, 132쪽)


가을밤, 여름을 아득하게 만드는 서늘한 밤공기는, 어쩐지 이국적인 설렘으로 가득하다. 삶의 온갖 순간 속에서 여행의 순간들을 발견한 이들의 에세이를 읽던 중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가을바람은 나를 먼 이국의 땅으로 데려가기에 충분했다. 나는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 들어갔던 모로코에서의 어느 밤 속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스물일곱, 첫 직장을 퇴사한 나의 상태는, 다음 여행지로 가기 위해 끊어놓은 비행기 티켓과 지갑을 모조리 도둑맞은 상태와도 같았다.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삶의 방향도, 목적도 모조리 잃어버린 채로 무작정 모로코로 떠났다. 그곳에는 나와는 달리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향해 씩씩하게 달려가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많은 배려 가운데 나는 모로코의 수도 라밧과 마라케시, 사하라 사막 등을 여행할 수 있었다.


마라케시는 도시 이름 자체가 'market'과 비슷한 까닭인지는 몰라도, 밤마다 커다란 야시장이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부터 코로나 직전까지 여의도에서 열리곤 했던 밤도깨비 야시장이 마라케시의 야시장과 흡사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십 년 전 모로코의 시장 풍경이 서울의 것과 같을 리 없지만, 활력만큼은 흡사했으리라. 너무 오래전이라 그곳의 풍경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와 나는 마라케시의 굽이진 골목 안쪽 숙소에 짐을 풀고 밤에 야시장에 나와 양고기 수프를 먹었다. 비리지 않고 따듯했다. 당시에는 국내에 양고기 집이 많지 않았던 터라, 살면서 처음으로 맛본 양고기였다.


마라케시의 밤에 대해서 떠오르는 거라고는 애석하게도 사실 그것밖에 없다. 모로코 풍으로 꾸며진 모텔 수준의 작은 호텔이 예뻤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그 길지 않은 순간 내내 많은 모로코 상인들이 뻗어오는 손을 뿌리쳐야 했고, 끝없이 "니하오"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기억. 그들의 커다란 눈 같은 게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파편화된 기억들을 하나  모아 보지만, 나는 그곳의  공기만이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다. 분명 내가 모로코에 갔을 때는  겨울이었는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라케시의 밤공기는  글을 쓰고 있는 구월 십육일 오후 아홉  오십 분의 서울의 십삼층 오피스텔에 깃든 공기와 사뭇 다르지 않다. 바람이 분다. 매일 같이 떠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게 만든 괴로운 이십 대의 바람과는 다른, 새로운 설렘을 실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여행길이 막혀버린 일상이지만 어디든 국경 없이 다닐 수 있는 바람이, 저 멀리 모로코 마라케시로부터 서울의 내게로까지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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