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치와 상처를 드러내고, 울게 만든 글들
나의 하루는 이미 새벽 5시에 시작되었다. 일어나자마자 이것저것 읽고, 허기가 져서 빵을 좀 사다가 어제 마시다 남은 커피와 함께 먹고, 전에 읽다만 단편소설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침묵의 사자」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내가 올해 들어 읽은 세 번째 소설이다. 이 소설을 다 읽게 된 7시 반 즈음의 나는 어쩐지 벌거벗겨진 기분에 소리 내어 엉엉 울고야 말았다. 아침부터 울고 있는 나를 겪어야 하는 나의 마음은 무척 탐탁지 않았다. 수면 아래에 감춰진 나의 무의식은 이토록 아프구나. 연약하고, 보듬어줘야 할 기억과 마음들이 마치 폐허가 된 도시처럼 그곳에 남아있었구나. 이런 깨달음도 반갑지 않았다. 나는 폐허가 된 그곳을 재건할 마음도, 폐허를 유적지처럼 잘 보존할 마음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렇게 문학을 읽고 우는 일을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던 내밀한 내 마음을 유일하게도 소설과 시가 대신 읽어준다고 느꼈고, 그게 기뻤다. 그래서 문학을 추앙했다. 적정한 말들을 고르고 골라 나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때면, 문학이 그 일을 대신해 내가 말하고 싶은 생각과 마음을 표현해 준다고 여겨져, 그것 또한 기뻤다. 그래서 문학을 사랑했다.
그러한 문학과 멀어지기 시작한 이후, 나는 우는 일이 매우 드물어졌다. 그러면서 눈물을 나약함의 방증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감정적 소모가 없으니 에너지 소모 또한 줄어든다고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연약하고 나약한 것들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 가운데 살게 되었다. 힘든 구석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괜찮다고 여겼다. 가뜩이나 내겐 영원불멸하며 전능하며, 사랑이 화수분처럼 넘쳐나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곁에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주에 「침묵의 사자」를 읽기 전에『달력 뒤에 쓴 유서』를 읽었을 때 이미 나는 이 소설 속 화자의 경험과 내 경험이 갖는 약간의 유사성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오늘 오랫동안 봉인해 둔 기억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엉엉 울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이 두 소설은 나를 벌거벗겼다. 가끔 꿈속의 나는 벌거벗은 채로 사람들 앞을 돌아다니는데, 옷을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지금도 그러한 마음이 되고, 태초의 에덴이 아닌 이 험한 세상에서는 벌거벗었음이 수치가 되므로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주신 가죽옷으로 수치와 상처를 가리고자 애쓰고 또 애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