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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K Apr 21. 2019

마음에 점을 찍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직장인의 일상이 괴롭다고 느꼈다. 괴운 이유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오른쪽에 있는 동료 직원에게 물어보니 내 말에 적극 공감했다.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 익숙해져 직장생활이 재미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월 통장으로 월급이 입금되는 순간,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괴로움은 안정감으로 변화한다. 그 변화도 반복되니 어느덧 안정감에 붙어있던 검은 점 하나가 암세포처럼 번져 불안감으로 바뀐다. 불안감.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점심만 한 게 없다. 내 마음대로 변주를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점심은 12시와 1시 사이에서 먹는 식사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중국에서는 출출할 때 아침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식의 의미로 쓰이며, 홍콩에서는 점심을 광둥어로 읽으면 딤섬이 된다. 간단하게 먹는 시간, 간단하게 먹는 음식인 것이다. 한자로 풀이하면 ‘마음에 점을 찍다’라는 의미가 된다. 불안감이라는 암덩어리를 다시 작은 점으로 회복할 수 있는 시간, 점심.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배꼽시계는 딱 11시 30분이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마치 알람이라도 맞춰 놓은 듯 소리가 난다. 때론 민망하기도 하지만 이 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전쟁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작전 회의가 시작된다. 작전 회의는 여러 사람의 협동이 필요하다.


제일 먼저 어제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아군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휴가나 반차로 점심에 자리를 비웠다면 작전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니 잘 파악해야 한다. 조사가 끝난 메뉴들은 오늘 전추에서 과감히 열외 된다. 고로 일주일째 저녁으로 먹고 있는 카레라이스는 제외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동일한 메뉴를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장군급 아군의 스무스한 명령이라던지, 전날 다 같이 회식을 한 아군을 위한 배려라던지. 이럴 땐 가능성의 폭이 좁아진다. 얼큰하면서 땀을 쏙 뺄 수 있는 메뉴. 순댓국과 뼈다귀 해장국 같은 매콤하면서도 든든한 메뉴가 최전방에 배치된다. 그래야 숙취 하는 큰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


최전방 메뉴는 대부분 아군과 협의를 하지만 가끔 아군이 적군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겠다고 샐러드를 주문한 경우다. 아군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너만 살아남겠다고?’ 하지만 동지들의 응원이 없으면 샐러드 고지는 3일 이내 무너진다. 또 다른 부류는 아침마다 직접 도시락을 싸오는 경우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 3일 이내에 무너진다. 아침잠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강력한 메뉴를 선택한 날에는 비상이 걸린다. 12시가 아닌 5분 전에 부정출발을 시작하여, 최단 코스로 경보를 시작한다. 이 경우에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리 지원군들을 파견하는 경우도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시작된 치열한 전투는 1시간이면 끝이 난다.


매번 다른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난제라고 한다. 하지만 매번 나에게 점심이란 마음의 점을 찍는 시간이다. 동료들과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지친 일상을 깨우기도 하고, 음식에 대한 평을 하기도 하고, 잠시 쪽잠을 자기도 하고. 오전에 있던 일들과 오후에 있을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 채 밥상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은 더 이상 마침표의 의미가 아닌 쉼표의 의미가 된다.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쉼표 말이다. 개도 먹을 땐 건들지 않는다는 말이 유일한 쉼표를 건들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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