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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원인 Oct 3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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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상.담.실









살면서 가장 맥 빠지는 일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때 같습니다. 밤새 작성한 문서를 저장도 하지 않은 채 통째로 날리거나, 정성껏 준비한 요리에 소금 대신 설탕을 부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처음 가진 열정과 의욕을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태권도장에서 만난 아이들과 매일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싸우지 말기, 놀리기 않기, 거짓말하지 않기, 정리정돈 잘하기 등 몇몇 약속을 정하고 셀 수 없이 되감아 늘어나 버린 카세트테이프처럼 쉰 소리로 외쳐대지만 늘 제자리입니다. 


나 이거 못하겠다!


출석부를 정리하던 아내에게 투덜댑니다. 아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자존심이 세네. 


선생님에서 쌤으로 스스로 위치를 낮추었지만 속내는 철없는 아이들을 개도하고 고양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가르쳐 보이겠다는 야망이, 코흘리개들이 흘린 컵떡볶이와 쭈쭈바 국물을 훔치며 제대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아내의 현역 시절 후배였던 분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후배는 충주 경찰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니 후배를 알아본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이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경찰특공대에, 대통령을 전담 경호했던 후배는 당시 찍었던 여러 사진과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늦은 밤, 풀어놓은 지난 추억들을 다 추스르지 못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아내에게 슬쩍 묻습니다. 


운동은 당신이 훨씬 잘했지? 


아내는 제 마음을 읽은 듯 이렇게 말합니다. 


난 원래 아이들 가르치는 거 좋아했어. 그리고 걔처럼 경찰 됐으면 당신 못 만났을걸? 


찌질한 야심가는 다시 한번 초라해집니다. 내일도 컵떡볶이 국물을 뚝뚝 흘리며 도장에 들어설 아이들과 한바탕 혈전(벌건 고추장 국물을 닦느라)을 치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허리를 숙이고 무릎 꿇은 모습이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원점이 아닌 제가 달려야 할 매일매일의 출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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