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망설임에는 미학이 없다

할까 말까 할 때도 해버리고 갈까 말까 할 때도 가버려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말고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서울대 교수의 인생 교훈이라고 한다.


주말에, 나는 살까 말까 했던 물건은 사지 말라던 교수님의 말을 어기고 살까 말까 한 달 이상을

망설이던 매트리스를 샀으며 할까 말까 망설이던 옥상 창고 정리는 교수님의 말처럼 해치워버렸다.

해버렸다도 아니고 해치워버렸다고 표현해야만 속이 시원할 만큼 창고는 엉망이었고 더 이상 물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포화상태였었다.


치우고 또 치우느라 밖으로 나온 짐들이, 마치 뉴스에 나오는 수해 입은 집처럼 보이기도 했을 정도로

해묵었던 책들부터 일 이년 전에 아들이 정신 못 차리고 뽑아서 들고 들어오던 인형들까지

수해가 아닌 인재임이 확실한 쓰레기의 잔치였다.

여자친구를 위해서 뽑았던 인형들은 헤어짐과 함께 창고 신세가 되었고

연애 이력과 함께 그의 인형뽑기 기술은 늘어만 갔을 것이다.

사람은 늙으면 뒷방 차지가 되고 애인과 헤어지면 인형은 창고 신세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오산인 게, 나는 물건을 살 때도 선택 장애가 없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그때그때 잘 정리하는 깔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창고 정리를 하면서

보니, 미안하지만 다 틀린 말이었다.

왜 좋은 건 다 나한테 갖다 붙이고 아니다 싶은 건 남편한테 갖다 붙이는지, 그것 또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스무 살 훌쩍 넘은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그렸던 의미 없는 그림부터 초등학교 때 썼던 알림장, 자기 친구랑

싸우고 사과하는 편지까지 어찌 된 일인지 친구에게 전해지지 않고 창고 안에 들어 있었다.


남편이 모아 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은 메일로 받는 남편의 급여 명세서가 1990년도에는 종이로 인쇄되어서 받았었다.

한 달 한 달 남편의 급여 명세서를 알뜰히도 모아 둔 수첩부터 가계부까지, 남편이 보탠 수집품은

1도 없던 창고의 짐들이었다.

그리하여,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창고 정리에 반나절 정도 시간이 걸렸다.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을 했을 때의 차이가 사진 두 장으로 확실히 드러난다.

역시 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하는 것을 강추한다.

말이 필요 없다. 사진이 말해주고 있으니...


정리하기 전, 창고 - 비포


정리 후 창고 - 애프터


이미 정리에 정리를 거듭한 끝에 가지고 있고 싶은 책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버리려고 마음먹고 나니

내가 왜 아직 이런 책도 가지고 있었나 싶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책부터 해마다 조금씩 사서 읽고 모아두었던 책들이 내 욕심의 민낯이었다.

명품 백은 단연코 진심으로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지만 책만큼은 욕심껏 차려놓고 읽고 싶었고

책이 가득한 책방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 책은 내 젊은 날 내 마음의 초상이었을 것이다.


만화책을 시작으로 전혜린부터 나혜석까지 최인호부터 나츠 메소 오세를 거쳐 법정스님의 무소유까지

나의 책들은 장르 불문 시대 초월로 가득 차 있었다.


다 버렸다.


2012년 판 무소유


남겨 놓은 책이라고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산에는 꽃이 피네 두권만 남겨두고 다 버렸다.

소유를 위해서 무소유를 남겨 둔 꼴이 되었다.


창고에서 끊임없이 나왔던 쓰레기들은 밖에 내놓기 무섭게 SOLD OUT 이 되었다.

폐지를 주으러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없었을 우리 집의 책들이 그분들에게는 다만 몇 천 원일지라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폭염주의보 속에서 옥상 땡 빚을 받아가며 정리를 한 후에 우리 부부는 정리하길 잘했다는 말을

서로 번갈아가면서 반복했어도 그 말이 싫지가 않았을 정도로, 잘했다는 마음뿐이었다.


할까 말까 망설였던 일 중에 2018년 교토 유학이 있다.

결정하고 준비는 했지만 가족을 두고 나 혼자 가는 것이었으니,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결정하고 추진해가면서 나에게는 직진뿐이라고 말하며 뒤도 안 돌아다 보고 준비하고 떠난 유학이었지만

혼자서 많이 뒤돌아보고 망설였던 2017년을 보내고 2018년에 떠났다.


지금 코로나 사태를 보고 있으면 내가 그때 다녀왔던 게 참 다행이다 싶다.

떠나지 못할, 하지 못 할 이유는 자기 자신을 뺀 외적인 이유로는 열 가지도 넘지만

막상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결심 딱 한 가지다.


책을 다 쓸어서 버리고 났더니 마치 내 젊은 날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 같은 허전함도 있었지만

어차피 현실은 오십 넘은 아줌마인 내가 남아 있을 뿐이니 책을 버리고 젊음이 간 게 아니라

젊음은 진작에 갔고 그걸 몰랐을 뿐이었다.



교수님의 인생 교훈에 숟가락 하나 얹자면

"버릴 까말까 할 때는 버려라"


망설임에는 미학(美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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