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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언제나 무거운 엄마 택배


엄마가 살고 있는 군산에도 코로나 환자 발생이 장난 아니게 생겨나서 이번 설에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엄마가 미리 떡국떡을 빼서 김치와 함께 택배를 보냈다.


계단이 가파른 3층 주택인 우리 집으로 무거운 택배를 짊어지고 올라 올 택배기사님을 생각해서

어디 외출도 못하고 택배 아저씨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택배비가 착불이라서가 아니라, 내 나름의 수고비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엄마의 택배는 충분히 미안해야 될 무게였기 때문이다.


김치가 두 봉지, 대파, 간 마늘 얼린 것 여덟 봉지, 아침에 찐 찰밥 두 팩, 파래 볶음, 닭정육 두 봉지

비타민 2팩에 영양제 한 통, 멸치 볶음, 들기름 한병, 청국장 한 덩어리, 돼지고기 찌개용 한 봉지

감기약 일주일분, 떡국떡과 가래떡만 해도 5킬로가 넘었다.

엄마 말로는 두 박스 챙겼는데 각각 20킬로가 조금 못되었다고 했다.

미리 감기약을 지어다 놓는 엄마는 항상 우리들에게 본인의 감기약을 나누어 주신다.

아플 때 병원 가기도 힘들 수가 있으니 종합 감기약정도는 집에 있어야 된다는 게 우리 엄마의 지론이고

엄마의 택배는 하여간 돈 빼고는 다 들어있다.


돈을 한 박스 보내주시지, 돈만 안 들어가 있지 구석구석 빈틈이 있을세라 비타민 씨까지 챙겨 넣은

엄마의 택배는 결혼한 지 이십육 년이 지났어도 받을 때마다 한결같다.


주제가 김치면 김치만 보내면 되는데 집안에 있던 온갖 것들을 챙겨서 보내는 게 특징이다.

우리 둘째가 두 살이었을 때, 엄마한테서 택배가 오면 상자 속에 자기 먹을게 뭐가 나오나 눈을 뒤집고

찾곤 했었다.

엄마는 사탕 한 봉지라도 상자 구석에 꼭 넣어서 보냈었기 때문에 두 살 짜리도 외할머니의 택배는

구별을 했었다.

"이건 외할머니 택빼애"

두 살 먹은 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엄마의 택배는 요술상자 같았다.

김치부터 마른반찬, 각종 양념까지 택배 싸기가 취미이자 특기가 돼버린 엄마 덕분에 오십 넘어서도

변변히 김치 조차 못 담그는 중년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모두가 엄마의 택배 때문이다.


하여간 힘도 세지!

40킬로에 육박하는 무거운 걸 두 박스 씩이나 집에서부터 고개 하나 넘어 택배 사무실까지 카트에 싣고서

눈길에 다녀온 우리 엄니 황여사다.

성질은 끝장나게 급해서 집으로 가지러 오는 걸 못 참고 직접 택배 사무실로 끌고 가서 부친 것이다.


엄마가 돈 주고 부쳤어도 엘베가 없는 경사 급한 계단으로 두 번씩이나 무거운 택배를 가져온 기사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음료수와 커피 한잔 정도에 해당되는 천 원짜리 몇 장을 드리면서 죄송하다고

두 번 정도 말했다.


"아저씨 죄송해요, 너무 무겁게 싸지 말라고 했는데도 엄마가 자꾸 이것저것 넣어서 많이 무겁죠"

"부모 마음이 다 똑같죠 뭘, 괜찮아요"



                                     

'부모 마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음이 부모 마음일 것이다.

두려울 게 없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을 마음이 부모 마음이니 대적할 자가

무엇이 있으랴 싶다.


내가 일본에 있었을 때 (2018년 4월-2019년 3월) 엄마가 교토로 나를 보러 오셨었다.




교토역에서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우시면서 "오메 시상에 네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냐"며

전라도 사투리로 푸념을 하면서 우셨다


교토까지 끌고 온 엄마의 보따리는 진짜 살벌했다.

"묵은 김치, 무김치, 새로 담근 김치, 소고기 고추장볶음, 멸치볶음, 장조림, 김

송편(송편까지 쪄서 갖고 오신 위대한 엄마다) 치약 샴푸 린스"


엄마 말에 의하면 공항에서 수하물이 무게 초과라서 이걸 버릴 수도 저걸 버릴 수도 없어서 몇 번을 끌렀다

쌌다가 아주 난리 때 굿이 났는데 용케 하나도 안 버리고 가지고 올 수 있었다면서 좋아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서 송편까지 쪄서 왔다니, 우리 엄니 황여사 정말 대단하긴 하다.


송편이야 그렇다 치지만, 치약 샴푸는 사서 쓰면 되는데도 그런 것까지 다 챙겨서 가지고

오는 걸 이해할 수 없지만, 부모 마음을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는 일


하여간 엄마의 김치 덕분에 빵집의 하마 다상에게도 조금 나누어 줄 수 있었고

엄마의 보따리는 국내에서건 외국에서건 한결같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박 삼일 짧은 일정을 마치고 여동생과 함께 돌아가던 날, 칸사이 국제공항 도착 10분 전에

지진을 만나 공항 가는 특급 열차에서 몇 시간을 대기하다가 결국 선로를 따라 피난 가듯 걸어서

전철역까지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비행기 타고 돌아온 인천에서 엄마가 지진이 너무 무서웠다면서 나는 얼른 내 집으로 가서

쉬어야 되겠다고 함께 여행 다녀온 인천 사는 딸네 집에도 안 들르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군산 리무진 타고 혼자 돌아온 이야기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군산에 도착해서 그날 밤부터 아프기 시작했다는 엄마가 아프고 난 끝에 하신 말씀은 딱 이 한마디였다.


"인자(이제), 내 생전에 일본은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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