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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그렇게 엄마가 되어간다.    

나는 계만은 하지 말아야지 했었다.

여기서 계란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1번 타고 다음은 2번이 타고 그러는 아줌마들의

저축 수단을 말한다.


엄마는 우리 동네 삼학동의 오래 되고 유서깊은, 동네 계에 유서를 붙이자니 웃기지만

하여간 뿌리깊은 원조 삼학동 동네 계주였다.

동네의 흔한 계에도 이름은 있었으니, 엄마가 하던 계의 이름은 "새마을 계"였다.

계주가 들고 튀는 바람에 이름이 밝혀진 "금복회"나 "만덕계"같은 이름만 들어도 돈 들어올것같은

계모임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모든 걸 말해주는 "새마을계" 

얼마나 소박한 이름인가

아마 엄마가 지었을것이다. 새마을 운동을 겪은 시절의 사람이니 계이름도 새마을계였지만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친여 성향이 강한 그런 사람은 또 아니다.


곗돈 장부에는 엄마가 꾹꾹 눌러 쓴 계원들의 번호와 이름이 번호가 일렬로 적혀 있었다.

태진이네, 꺼꾸리아줌마, 슈퍼,선수네,경희네,조희 미용실

아들이 태진이여서 태진이네, 엄마 뱃속에서부터 거꾸로 있었다고 해서 꺼꾸리 아줌마

태어나면서부터 슈퍼를 하고 있었을것 같은 슈퍼 아줌마

내가 아는 아줌마들도 있었고 엄마만 아는 아줌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만고만하게 연결되어 있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의 조합이었을것이다.


곗돈 태워 주는 날이 되면 엄마가 나를 불러 엄마가 한 번 세어 본 돈을 나한테도 세어 보라고 했었고

원금 외에 이자까지 맞춰서 엄마 한 번, 나 한번 틀림없는지 헤아려 보는 게 한 달에 한 번 있는 엄마와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1980년대 중반,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뭉칫돈을 세어 볼 일은 곗돈 외에는 없었고 그러니

오른손 잡이인 내가 돈만은 왼손으로 센다는 것도 엄마가 그때 알게 된 거고

나도 엄마의 새마을 계 덕분에 나의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곗돈을 세고 있는 나를 보면서 엄마가 신기하게 보면서 말했었다.

"너는 돈은 왼손으로 세는구나"

엄마는 "계"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계주"였다.


오로지 현금으로만 오고갔던 새마을 계의 곗돈을 모아두었다가 순서에 맞게 태워주고

각자 집의 사정에 따라 돈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5번과 6번을 바꿔주기도 하는 중재자의 역할도 했고

계원들중에 누군가 급히 돈이 필요하면 다른 계원들중의 누군가의 돈을 빌려서 꾸어주기도 했던 

돈의 흐름을 파악해서 돈을 풀고 조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계주였고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가만히 앉아서 타기만 했던 아줌마들과는 다르게 누군가 계를 타려면

엄마와 나의 수고로움이 들어가야만 해던 군산시 삼학동의 새마을계의 계주가 우리 엄마였다.

그리고 자기 곗돈을 타먹은 후에 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돈까지 밀어넣는게 계주였다.


어쩌다 시작한 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새마을계를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시작해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해서 큰 애를 낳을 때까지 했었다.


왼손으로 남의 돈을 세기만 했던 역할에서 결혼하고 나서는 나도 한사람 몫의 계원이 되기도 했었다.

왼손으로 내 돈이 맞는지 세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계라는 게 그렇게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진이네 엄마가 곗돈을 타먹고 튄 것이다.

정신없이 산만했던 태진이를 데리고, 꽃게를 한보따리 들고 왔던 태진이 엄마가 생각난다.

우리 동네 아줌마들 치고는 얼굴 화장이 진했던 태진이 엄마는 남편이 선원이었다.

배 타는 아저씨가 가져 온 꽃게를 우리집에까지 쪄서 와서 배부르게 먹여 놓고는 얼마 안되서

그대로 튄것이다.

딱한 사정이 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다른 사람이랑 순서를 바꿔줬을테고

태진이 엄마는 곗돈을 타먹고 날랐다.

내가 그동안 먹었던 꽃게중에 가장 비싼 꽃게를 먹었다.


엄마는 힘들었을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고3이었을 때 실직을 하셨다.

살림만 하고 경제활동이란 새마을 계의 계주가 전부였던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정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태진이 엄마가 돈을 들고 튀었어도 계는 쭉 하셨다.


태진이 엄마만 곗돈들고 튀었겠는가

더 있었을것이다.


남의 돈까지 곗돈을 밀어넣느라 정말 본인은 맘 편히 빤쓰한장 옳게 된 것을 사입지 못하는 엄마를 보는 일은

짜쯩이었다.


"엄마 이제 계는 그만 해"

내가 결혼하고, 나도 엄마의 계를 한 번 탄 후에 엄마의 새마을 계는 멈췄다.

엄마도 "인자 안할란다" 그러셨다.

왜 그렇게 계를 했냐고 물었더니, 안그러면 니들 등록금 어떻게 마련했겠냐고 그러셨다.

계주가 1번으로 이자 안물고 타서 등록금 줄 수 있는 길이 계밖에 없어서 그랬다고 하셨다.


나도 엄마가 하던 계를 한다.

물론 내가 계주다.

스물 일곱 먹은 승범이가 고3이었을때 입시 악기 대여비와 막판 렛슨비에 연습실 사용료

전부해서 한 달에 천만원쯤 필요했었다.

2011년도 이야기다.

주변 사람들 끌어모아 삼백짜리 계를 만들어서 내가 1번으로 두 몫 타고 나머지는 엄마한테 빌려서

천만원을 만들어서 바이올린 삼백주고 빌리고 연습실 비용과 렛슨비를 충당했었다.

다행이 중앙대학교에 합격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열달동안 곗돈을 냈었다.


그때 만들었던 나의 계조직은 지금까지 쭉 이다.

멤버만 조금 바뀌었을 뿐 그 사람이 그사람인 채로 곗돈도 그대로 삼백만원으로 유지된다.

10년째하고 있는 이름없는 계다.

다행인것은 곗돈 떼먹은 사람도 없고 날짜 지나서 곗돈 부치는 사람도 없이 제 날짜에 딱딱

황금멤버로 굴러 가고 있다.


곗돈을 떼먹은 태진이 엄마 같은 사람이 있었어도 엄마가 계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10년동안 계를 하면서 늘 자식을 위해서 쓰든지 집안 살림에 보태든지 했었다.

나를 위해서 쓴 것은 2018년도 교토에 어학연수갈 때 냈던 한학기분 학비였다.

어쩜 그렇게 곗돈과 딱 맞는 300만원이었는지

1번으로 탄 곗돈 300만원을 30만엔 학비로 입금한 것이 10년동안 곗돈 역사에 남는

나 자신을 위한 돈이었다.


계만은 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나는 지금도 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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