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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등교(登校)의 계절

-알고보면 일본말인 등교와 하교-

등교(登校)와 하교(下校)

알고보면 일본말이다.


"치코짱에게 혼난다" 의 5살 치코짱


NHK 프로그램중에 "チコちゃんに叱られる" 치코짱니 시카라레루 - 치코짱에게 혼난다-

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일본 나이로 다섯살 먹은 치코짱이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것도 모르냐면서 화를 내고는 정확한 답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이다.


다섯살 치고는 눈매가 보통이 아니고, 인형 캐릭터지만 화를 낼때는 소리도 막 지르는

알고보면 막돼먹은 치코짱이다.


어느 날 치코짱이 진행자인 오카무라에게 왜 학교 가는 것을 등교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하교라고 하냐고 물었다.

tv를 보고 있던 나도, 왜 그렇게 말하지


오를 등자를 굳이 써가면서 학교 간다고 표현하는 것을 이유도 모르고 썼었네 싶었다.

학교가 산도 아니고 오를등자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학교가는 길이 등교, 집에 오는 길이 하교가 된 이유를 나도 NHK를 보면서 치코짱에서 배웠다.



등교(登校)


학교에 가는 것이 등교가 된것은 일본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산에 있는

일본 신사(神社;じんじゃ 에 부속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어린 아이들은 산에 올라가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서 집으로 갔다.

등교와 하교는 일본의 에도시대에 생겨난 말이다.

그걸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쓰고 있는 것이고, 어쩜 치코짱에게 혼나야 될 사람들은

일본의 어른들이 아니고 우리들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라고 해도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은 매일 등교가 되었다.

보육교사 자격증을 2011년도에 따놓고 잘도 써먹고 있다.

역시 인생은 자격증이다.

3월 3일부터 5월 31일까지 3개월 대체강사로 4시간 단기 보육전담사로 일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세상 물정은 고사하고 오른쪽과 왼쪽, 정문과 후문, 3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방법을 모르고

보건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당연히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3층에서 아이 손 잡고 정문과

후문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 모르겠다.


계단에 친절하게 써 있었다.

1계단을 오르면 수명이 4초 늘어난다고, 하루에 수명을 4만초쯤 늘리고 나서야 첫 날이 끝났다.

아이들이 정문과 후문의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고, 3층에서 1층으로 내려 가서 현관 옆에 보건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의 생명연장 프로젝트는 끝날 것이다.




"선생님. 제 신발이 없어졌어요"

신고 왔던 운동화가 없어졌다면서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1학년 남자애가 말했다.

운동화와 구두, 여학생 신발과 남학생 신발을 구분해가면서 신데렐라 운동화 찾기를 시작했다.

자기 운동화에는 분명히 이름이 적혀있다면서 마지막 한켤레 남은 운동화를 자기 운동화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고집스런 자슥을 봤나-.-

색깔과 모양은 같으나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는 이유로 마지막 한켤레 완벽하게 남아있던 운동화를

신지않겠다고 하는 1학년의 고집 좀 보소

이름이 적혀있다는 지점을 확인해봤으나, 아이의 이름이 없었다.


"이 나이키가 니 나이키냐"

"아니예요. 제 신발에는 이름이 적혀 있어요"

"그럼 저 나이키가 니 나이키냐"

"아니예요. 제 나이키에는 엄마가 이름을 적어놨어요"

1학년 아이의 증언을 100% 채택한 내 잘못이었다.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거짓 증언은 아니었고 다만 이름이 적힌 위치가 아이가 말한 곳이 아닌

숨겨진 포인트에 있었다는 것!!!

무슨 놈의 나이키 운동화에는 글자가 바글바글 써져 있는지, 하필이면 그런 곳에 아이 이름이 있을 줄-.-


동화와 현실은 다르다.

정직함의 댓가로 나뭇꾼은 도끼를 아이템별로 획득했지만

정직한 아이는 나이키 운동화 세켤레대신 자기의 나이키 운동화만 1 획득해서 결국 집으로 돌아갔고

신데렐라 운동화 찾기를 하는 동안 나는 계단 오르기로 획득한 수명연장 사만초를 순간 잃었다.


내가 아이들을 본 3월 3일 첫 날

1학년 여자애가 자기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학교가 유치원보다 이렇게 복잡할지 몰랐어요"

"내가 할 소리를 니가 하는 구나"




우리나라는 3월이 등교의 달이고 일본은 4월이 등교의 달이다

2018년 3월에는 일본에 갈 준비로 매일이 바빴다.

내가 갈 준비로 바빴던게 아니라 남아 있는 가족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지 그걸 궁리하느라 바빴다.

혼자서 일본에 가서 살아야 할 오십 한살 아줌마가 남아 있는 네 명 120살을 걱정했다.


반찬집을 알아보고 일주일에 두 번 새벽배송을 받을 수 있게 일 처리를 해놓고 가르칠건 가르치고

스스로 하면서 살아갈수 있게 매일매일 몸과 입이 바빴던 하루였다.


그랬음 뭐하나-.-

일주일에 두 번 배송받던 반찬집의 반찬들은 남편이 혼자서만 먹다가 버리는게 더 많아져서

그만뒀다했고 남편은 잡탕찌개 끓이는 솜씨만 늘어서 온갖것들을 다 한 냄비에 때려넣고 끓여서

그 속에서 깊은 맛을 우려내는 쉐프가 되었다.

입들만 살아서는 결국 반찬집 배송을 거부한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6학년때까지 한 학년에 세반만 있던 시골의 국민학교에 다녔던 나는 집에서부터 학교가 지금 생각해보니

4km 남짓 되지 않았나 싶다. 어쩜 더 될수도 있다. 아주 먼 곳에 학교가 있었다.

우리들이 신작로라고 불렀던 먼지가 펄펄 나던 길을 걷다가 논길을 지나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도

몇 마을을 지나야만 학교가 있었다.

도저히 1학년이 걸어서 다닐 수 없는 곳에 학교가 있었지만 나보다 더 먼 곳에 살던 아이들도

다들 그렇게 걸어 다녔었다.

그래도 등교길이 멀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것같다.

한 동네 살던 큰집에 먼저 들려서 큰집 언니 손을 잡고 멀고 먼 학교까지 노래도 부르면서 갔고

한마을에 살던 아이들을 애향 소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짜서 함께 다니라고 했을 때는

동네의 큰 나무 아래에 모여서 여자 남자 줄을 서서 등교를 했었다.


이름도 거창한 "애향 소년단"

애향소년단 활동으로 동네 꽃밭 가꾸기를 했었는데 등교전에 모여서 여자 남자 따로 관리하던 꽃밭에

물을 주고 줄을 서서 학교에 갔었다.

말이 꽃밭 가꾸기였지 흡사 그것은 전쟁이었다.

마을의 공터를 공평하게 반으로 갈라서 경쟁적으로 꽃을 심고 물을 주고 상대방 꽃밭에 뭐라도 피어 있으면

전쟁에서 진 것처럼 통탄하면서 부지런히 이쪽도 꽃을 피워 냈다.

우리들은 그때 시골 마을 꽃밭에 무엇을 심었을까?

아마 집에서 캐온 박꽃이나 산에서 철쭉이나 진달래를 캐다가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온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학교까지 걸어 갔던 등교길

등교길이 심심할 틈이 없었다.


하교길은 어땠을까!

하교길에 대한 무서운 기억은 급식빵에 대한 것이다.

2학년때 일주일에 한 번 타먹는 급식빵이 있었는데 그걸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아이가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빵을 내놓으라면서 겁을 줬었다.

아마 나보다는 큰 고학년이었던것 같은데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자기 키보다 큰 막대기를 들고

나타나서 "빵을 내놓기 전에는 이 길을 못지나간다"며 협박을 했었다.

늘 친구들과 함께 가는 하교 길이었지만 빵으로 협박을 당한 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였던것같다.

급식빵을 뺏기지 않으려고 죽기살기로 뛰던 2학년의 내가 보인다.


어느 날은 엄마랑 학교근처의 농협에서 만나서 함께 집으로 걸어 왔었다.

시골에서 살다가 군산으로 이사가기 전, 엄마가 농협에서 예금을 찾아서 내 책가방안에서

책은 꺼내서 엄마가 들고 빈 가방안에 군산 집값을 전부 현찰로 가방안에 넣었다.

시골길에 가방안에 현금이 있다한들누가훔쳐 갔겠을까 싶지만

엄마와 나는 둘만 아는 비밀을 가방안에 간직한채, 집까지 멀고 먼 길을 걸어왔었다.


1980년, 군산 우리집은 1700만원이었다.

6학년 딸의 가방안에 1700만원을 넣고 엄마는 내 책을 보따리에 들고 걸어 오다가 양호 선생님을 만났다.

나를 예뻐해주셨던 양호선생님이 나를 보고 "우리 똘똘이"라고 해주셨다.

엄마는 웃었던것같다.


그날은 빵을 강탈해가려는 막대기 오빠도 없었고, 늘 동생들 옆에만 있었던 엄마가 몇시간 동안

내 옆에만 있었던 내 생애 최초의 날이었다.

생각해보니 가장 행복한 하교길이었던것같다.


양호선생님이 붙여준 별명 "똘똘이"처럼 잘 살고있나 뒤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도 수명연장하러 학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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