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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요뽀기는 사랑을 싣고

2018-2019 나를 먹여살린 소울푸드 목록


나는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다.

김치를 꺼내놓지 않아도 식사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일주일 내내 김치 한 쪽 집어 먹지 않아도

식사가 가능한 한국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 일본에 갈 때 김치없으면 못사는 한국사람은 아니니까 음식가지고 걱정은 없겠구나 했었다.


오산(誤算): 예상이나 추측을 잘못함


김치따윈 없어도 괜찮다라고 큰소리 뻥뻥 쳤던 내 입을 찧어가면서, 잘못했으니 제발 하느님 어디서

김치 한 쪽만 제 밥상에 떨어지게 해주세요라고 바랬던 적이 진심, 열번도 넘었다.

2018.4-2019.3월 까지 아마 열번도 넘게 교토의 내 방에서 김치를 사무치게 그리워했을것이다.


혼자 사는 아줌마 밥상은 단출했다.

여섯시에 알바가 끝나면 집 근처에 있는 24시간 슈퍼 (프레스코)에 들러서 간단하게 장을 봐서 집으로 갔다.

처음에 주로 먹었던 음식은 일본 된장(미소)에 유부를 넣고 미역을 넣어 함께 끓인 유부 미역 된장국이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밥상을 차렸던 이십 몇 년의 세월을 확 제껴버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밥상을 차렸다.

처음에는 소꿉장난같고 재미있어서, 일본 된장국에 밥을 말아 노란 다꾸앙을 반찬삼아 살아도

잘살것같은, 친일파적 피가 흘렀으나-.-

그동안 길들여진 입맛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였다.


아삭아삭 무김치 한 쪽 깨물어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김치를 좋아했든 좋아하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 혀는 매운맛에 충분히 길들여져 있었고, 느끼한 음식을 먹은 후에 한쪽 집어 먹는 김치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는 것을 몸이 알고 있었던 거다.


매일 먹었던 익숙한 맛을 끊어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교토 일년 살이에서 찐으로 배웠다.

버터 냄새 느글거리는 빵집 출하부에서 교토 마블 76겹 식빵을 네시간 정도 자르고, 포장하고, 눈으로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남편과 보이스톡 전화를 하면서 무김치를 아삭아삭 베어무는 ASMR을 요구했다.


Autonomous 자율

Sensory 감각

Meridian 쾌락

Response 반응


남편이 무김치를 아작아작 깨무는 소리는 나의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었고

둘의 나이를 합쳐 백살이 넘은 것들이 카톡전화로

"무김치 깨물어 먹는 소리 좀 내줘 제발, 아니 그렇게 깨물지 말고 더 아작아작, 그렇게 밖에 못 먹냐"

"더 잘 좀 아삭거리게 깨물어봐, 잘하는게 진짜 아무것도 읎써,버럭버럭"


대화중에 김치가 없었다면 자칫 59禁으로도 들릴 수 있는 우리 둘의 대화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리얼이다.


이후, 살아야 했으니 살 길을 찾을수 밖에-.-

살고 있던 동네의 24시간 슈퍼 프레스코에서도 김치를 팔고 있었다.

비록 젓갈맛보다는 미원 스멜이 넘쳐났지 일본의 얇은 삼겹살을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면 딱 이었다.

김치찌개를 한냄비 끓여놓은 날이면 머리를 박고 밥을 먹었다.

프레스코 슈퍼의 미원 스멜 푹 익은 김치

고마웠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만 이년이 조금 안된 지금

냉장고에 김치, 그냥 보고만 있다.


교토에서 지내는 동안 김치도 못 담그던 내가 나중에는 내 손으로 깍두기도, 김치도 대충은

흉내내서 만들어 먹었다.


동네에 새로 생긴 채소가게에 하도 들락거려서 채소가게 아저씨가 이것저것 덤도 주고 혼자사는

한국 아줌마라고 관심을 가져주는 통에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의리하나는 끝내주는 여인네라

국제적인 바람을 피우지 않고 무사히 귀국했다.


배추사러 가서는 배추만 사자
무까지 사오면 일이 커진다

한국에서는 못담그던 김치를 교토에서 인터넷으로 배웠다.


배추와 무는 일본에도 얼마든지 있지만 (*한여름과 오봉 명절 전에는 비쌌지만)

김치를 담그는데 결정적인 재료들은 둘째가 교토로 부지런히 날랐다.

굵은 소금부터 까나리 액젓까지 가방가득 평균 두달에 한 번은 교토로 날라왔다.


까나리액젓만큼 나를 기쁘게 해준 구호물자, 그중에서 나를 기절시킬만큼 기쁘게 한 게 있었으니

그것은 문제의 요뽀기



요뽀기 여덟봉지는 딸이 챙겨 온 깜짝 선물이었다.


면세점에서 사서 가지고 온 떡볶이

일본의 슈퍼에서는 팔고 있지만 우리나라 슈퍼에는 없는 요뽀기다.


사실 맛은 풀무원이나 미정당 국물 떡볶이가 더 맛있지만 일본 사람들 입맛에 맞춰진

단맛이 강한 편이라, 내가 원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떡볶이를 좋아하는 나를 주려고 수화물 초과해가면서

사서 가지고 왔었다.


가방에서 나온 떡볶이를 보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던것같다.


명절에 몇 소쿠리씩 부쳐놔도 천덕꾸러기 대하듯 눈을 세로로 뜨고 쳐다보던 전들도

가끔은 미치게 먹고 싶을 때가 있었다.



혼자서 만들어서 막걸리 대신 맥주를 마시면서 맛의 향수를 달랬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내가 아줌마라는 거였다.

대충은 뭐든 만들줄 아는 아줌마여서 먹고 싶으면 만들어 먹으면 되니까 내가 나를 먹여 살렸다.



요뽀끼로 국물 떡볶이를 만들어 후루룩 츄릅 내고 싶은 소리 다 내가며 햇빛 안드는 내 방에서

매운 맛의 향수를 풀었다.


떡볶이는 향정신성 음식이었다.

달달구리 매운 맛이 입안에 쫘악 퍼지면, 우중충한 방도 견딜만 했고, 늘 있는 시험도

"이것 먹고 열심히 하자" 활활 매운맛 의지를 불태웠다.


진심 테스엉아한테 묻고 싶다.

"테스엉아, 떡볶이는 왜 그렇게 맛있는거야, 대답해줘 테스엉아"

"테스엉아, 집에서는 안먹던 김치가 왜 그렇게 생각나는거야, 대답해줘 테스엉아"

"테스엉아, 우리집 양반은 김치 먹는 소리 하나도 왜 내 마음에 안들게 내는거야, 대답해줘 테스엉아"


일주일에 한 두 번, 아르바이트가 없던 날이면 학교 끝나고 마루가메제면 카와라마치 산죠점에

들러서 카케우동을 사먹었다.


290엔짜리 카케우동


일주일에 한 두 번 오후 일과가 없는 느긋함을 가케우동을 먹는 즐거움으로 시작했었다.

현지인들과 섞여서, 무심한듯 핸드폰을 보면서 먹는 카케우동은 맛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소확행

그런 거였다.


어떤 음식이 나를 위로해주었나

가끔은 사람보다 한 그릇의 라면에서 찐한 위로를 받기도 하고 함께 먹었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그런 음식이 있었던가


너구리 라면


너구리 좋아하는 사람은 너구리만 먹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1982년에 첫 출시 된 너구리 라면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너구리 라면을 그때 영접한 후

늦게 집에 돌아 온 아버지와 함께, 밤에 야자 끝내고 와서 아버지랑 함께 먹던 너구리 라면


그게 가장 맛있었던 음식같다.


함께 라면 먹을 아버지는 이제 안계시지만, 아버지 덕분에 너구리를 알게 되었다.


뭐 그또한 감사할 일 아닌가.


믹스커피로만 아버지를 기억했었는데, 글의 힘이란 이런거 아닌가 싶다.


TV도 사랑을 싣고, 요뽀끼는 매운 맛을 싣고, 너구리는 추억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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