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이 철없이 철없이 철없이 철없이 살다가 내가 미쳐'거리는 3음보의 옛 시조가 하나 있었으렸다. 내 이야기다. 결국 사표를 내 버린 것이다.
전날 밤까지 친구들에게 괴로운 머릿속을 털어놓다 맞은 아침. 고민을 묵혀둔 지는 오래됐지만 이렇게까지 바로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지시가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기 전까지는.
이번 지시는 저번주 금요일쯤 출입처에서 나온 보도자료와 관련해 다른 현장을 더 붙여서 수요일자로 기사를 준비하라는 거였다. 나를 발끈하게 한 건그 지시가 풍기는 어설프고 성의없는 냄새,익숙한 악취다. '알아서 어떻게 자알 해봐라'.
각 배송업체 물류센터에 Ai가 도입돼 주문 들어오는대로 주문량을 어쩌고저쩌고 해 (애정이 없어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재고를 줄이는 데에 기여한다는 아이템이데, 금요일 기획 회의에서 부장의 '시청자들이 과연 궁금해할 내용인가'라는 피드백에 할말이 없어졌다. 내가 낸 발제가 아니기에 방어하는 데에 체력을 쓰지도 않았고, 꽤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왜인지 타 언론사는 그 어느곳에서도 그 보도자료를 중요하다고 보지 않을 것 같다는 4년차의 직감도 분노에불을 지폈다.물론 타사에서 안 쓰더라도 우리 판단으로 충분히 쓸 수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 존엄한 우리 판단의 타당성이다.충분히 고민후 이런 기사 출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아침회의에 가져갈 기사를 급조해야 한다고 느꼈는지어느 검찰에 출두하는 피의자처럼와이어리스를 들고 피드백 감옥에 가두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반발했냐고?분노보다 체념이가성비가 좋고, 답이 너무나 분명한 것에 대해선 오히려 묻지 않는게 피차 낫다는 건 이 회사가 내게 가르친 처세술이다. 그 교훈을 따랐다.
새로운 주가 시작되고 발제가 없다보니 본격화된 애매한 아이템 CPR. 이거 말고 딴 걸 하겠다 들이밀 아이템도 없으니 나는 오늘 하루를 꼼짝없이 이 내용을 알아보며 보내야겠구나. 기획회의에서 피드백을 한 건 부장이고 살려서 발제를 위한 발제라도 내보내자는 건 차장이니 둘의 불협화음에 등이 터지는 새우가 된 듯도 했다.
이 새우는 생각했다고 한다. 아,재미가 없다.굳이 써야되나 싶다.그것도 이렇게 촉박하게? '그렇게 쓰고 싶으면 네가 써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익숙한 감각이다.
이제 정말 그냥 그래도 닥치고 해줄 수가 없을 정도로 이 현실이 진절머리가 나버렸다. 방송사는 이런 기사를 '미방'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그 권한이 이행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여긴 나의 판단이나 예측이나 직감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다. 세상에, 이들이 또 내 노동력을 착취해 내 이름 바이라인을 도용하려 하고 있다! 비상! 도망쳐!
2년 전 정책부에서부터 쌓아오던 불만과 고민이 한 번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망설이다, 번지점프를 뛰어내리는 기분이랄까.
그래. 이 꼴 더 안 보려면 나가자. 지금 나가겠다고 하면 이 아이템 더 안 알아봐도 되겠지.
그날 부서에 처음 배정된 수습과의 어색한 첫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녀 옆에 앉아있던 부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